[Cook&Chef = 정수연 기자]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의 식탁에도 등장하고, 집들이 상차림이나 온라인 레시피에서도 심심찮게 만나는 음식이 있다. 생선에 라임즙을 더하고 붉은 양파와 고추를 곁들인 세비체(Ceviche)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름부터 낯설었던 이 요리는 어느새 우리에게도 제법 익숙한 메뉴가 됐다.
그런데 세비체는 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시작된 음식일까. 반드시 광어나 특정 생선을 사용해야 할까. 생선에 라임즙을 더한 요리라면 모두 세비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먹는 방법은 익숙해졌지만 정작 그 이름과 유래에 대해서는 궁금해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세비체의 고향인 페루로 향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새콤한 생선요리 한 접시에는 이 나라가 지나온 긴 역사가 담겨 있다.
풍요로운 태평양에서 시작된 식문화
페루 서쪽에는 태평양이 길게 펼쳐져 있다. 해안을 따라 흐르는 차가운 훔볼트 해류와 바다 깊은 곳의 영양분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용승 현상은 이 일대를 풍부한 어장으로 만들었다. 플랑크톤을 먹고 자라는 작은 물고기부터 다양한 해산물까지, 바다는 오랫동안 해안 주민들의 식탁을 채웠다.
페루 북부에서 발전한 모체 문화의 도자기에는 물고기와 어업 장면이 남아 있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의 기록에서도 이 일대 주민들이 생선을 날로 먹던 모습이 확인된다. 세비체에 사용하는 고추 역시 유럽인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아메리카에서 재배하던 작물이었다. 바다에서 얻은 생선과 고추의 맛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익숙했던 것이다.
모체 사람들이 신맛 나는 툼보 열매로 생선을 절였다는 세비체 기원설도 전해진다. 2026년 발표된 역사학 연구는 오래된 생선 섭취 문화와 세비체의 구체적인 조리법을 구분하고, 음식 이름과 재료가 확인되는 19세기 문헌에 주목했다. 그 사이 페루의 식탁에는 새로운 재료들이 들어와 있었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재료, 달라진 식탁
그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기가 16세기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1542년 페루 부왕령을 설치하면서 정치와 경제, 종교와 언어, 일상생활이 크게 바뀌었다. 약 300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는 음식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재료가 감귤류와 양파다. 오늘날 세비체에 사용하는 라임과 양파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진출 이후 널리 퍼진 작물이다. 페루 연안에서 잡은 생선과 토착 고추에 새로운 신맛과 향을 더할 재료가 들어온 셈이다. 반면 세비체 곁에 놓이는 옥수수와 고구마에는 아메리카의 오래된 농업문화가 이어진다. 접시 하나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유래한 식재료가 모인 것이다.
음식의 이름에도 지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스페인에는 생선이나 고기를 식초에 절여 먹는 ‘에스카베체(escabeche)’라는 요리가 있다. 아랍권에서 전해진 절임 음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페루의 ‘세비체(ceviche)’라는 이름도 에스카베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페루에서는 오래전부터 먹어온 생선과 고추에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전해진 신 오렌지 등의 감귤류를 더하며 고유한 조리법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여러 문화의 재료와 맛이 어우러진 세비체는 19세기 페루의 기록에 등장하며, 당시 사람들이 이 음식을 어디에서 어떻게 즐겼는지도 보여준다.
독립 이후 리마의 거리에서 만난 세비체
1821년 페루가 독립을 선언한 뒤, 세비체를 둘러싼 기록은 19세기 도시의 풍경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1860년 리마의 안내서에는 생선이나 새우를 신 오렌지즙과 고추, 소금에 재우는 음식이 등장한다. 지금의 라임 세비체와 이어지는 조리법이지만, 당시에는 신 오렌지도 중요한 재료였다.
그 음식을 즐겨 먹던 장소 가운데 하나가 피칸테리아(picantería)였다. 고추를 넣은 지역 음식과 옥수수 발효주 치차를 팔던 대중적인 식당으로,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요리하고 음식을 판매하는 일에 참여했다. 생선을 잡아오는 사람들의 손에서 시작된 한 끼는 이렇게 도시의 장사와 노동, 이웃들의 식사 속으로 들어갔다.
19세기 말에는 리마의 아초 투우장에서도 세비체를 만날 수 있었다. 1889년 출간된 기록에는 경기를 보러 온 상류층 관객들이 세비체를 손으로 집어 먹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평소 격식을 중시하던 사람들까지 거리의 매운 생선요리를 함께 즐긴 장면이다. 세비체는 어느새 서로 다른 계층이 같은 맛을 공유하는 리마의 음식이 되어 있었다.
거리와 식당에서 먹던 세비체는 요리책에도 이름을 남겼다. 그런데 그 책을 펼치면 오늘날의 세비체와 뜻밖의 차이가 드러난다.
오렌지 서른 개와 여덟 시간의 기다림
1890년 후아나 마누엘라 고리티가 편찬한 『코시나 에클렉티카(Cocina Ecléctica)』에는 코르비나 생선을 사용하는 세비체 조리법이 수록돼 있다. 신 오렌지 30개의 즙에 양파와 고추, 오레가노와 커민을 더한 뒤 생선을 무려 여덟 시간 동안 재우도록 했다. 같은 이름의 음식이라도 지금의 한 접시와는 산미와 질감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1926년 페루의 요리책에서도 신 오렌지를 선호하고 레몬은 피하라고 안내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페루의 세비체는 라임의 산미를 살리고, 생선을 짧게 버무려 신선한 질감을 즐기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세비체 전문점에서 주문 직후 재료를 섞어 내는 풍경은 이런 변화의 결과다.
그 변화에는 또 다른 이민의 역사도 겹쳐 있다. 1899년 일본인 이민자 790명이 페루 카야오항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농장에서 일했던 이들과 후손들이 이후 도시의 외식업에도 진출하면서 일본의 생선 손질법과 페루의 고추·감귤류를 결합했다. 그 과정에서 생선을 얇게 저며 소스를 곁들이는 티라디토(tiradito) 같은 음식도 발전했다.
일본계 페루 요리인 니케이(Nikkei)는 오늘날 세비체의 짧은 절임 방식에 영향을 준 흐름으로 평가된다. 페루 북부의 조리 관습 역시 그 변화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민자의 기술이 리마의 세비체를 바꾸던 동안, 페루의 다른 지역에서는 산지마다 다른 재료가 또 다른 모습을 만들었다.
지역마다 다른 세비체, 하나의 페루
오늘날 피우라에서는 유카와 콩류를 곁들이고, 북부 툼베스에서는 맹그로브의 검은 조개로 세비체를 만든다. 안데스 산악지대에서는 송어가, 아마존에서는 파이체 같은 민물고기가 접시에 오른다. 페루 사람들은 저마다의 바다와 강, 농경지에서 얻은 재료로 같은 이름의 음식을 이어왔다.
그렇게 각 지역의 일상에 뿌리내린 세비체는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인정받았다. 페루 정부는 2004년 세비체를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2008년부터 매년 6월 28일을 ‘세비체의 날’로 기념한다. 바로 다음 날인 29일은 어부들의 수호성인 성 베드로의 축일이다. 일부 어촌에서는 이날 종교행사와 함께 세비체를 나누며 바다와 공동체의 관계를 이어간다.
2023년에는 세비체의 조리와 소비에 관련된 관습과 의미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랐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것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고 농부가 재료를 키우며, 조리사와 가족들이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는 과정이었다. 생선을 다루는 기술부터 지역별 조리법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이어져 온 생활문화가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다.
한 접시에서 다시 만나는 페루의 시간
처음의 세비체 접시로 돌아가면 생선과 라임, 고추와 양파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태평양 연안의 오래된 식생활에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재료가 더해졌고, 리마의 여성 상인들과 일본계 요리사, 페루 각 지역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맛을 이어왔다.
다음에 세비체를 먹는다면 생선만큼이나 그 옆의 라임과 옥수수에도 눈길이 갈 것이다. 먼 바다를 건너온 신맛과 오래전 안데스에서 재배한 곡물이 지금은 같은 접시에 놓여 있으니, 그 한 끼가 조금 더 흥미로워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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