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냉이를 대신한 '어른의 매운맛'

[Cook&Chef = 이승우 기자] 일본 음식이 대체로 달고 짜다는 것은 흔한 인식이자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통념이다. 하지만 늘 슴슴하고 달착지근한 요리만 존재할 것 같은 그들도, 알고 보면 그들 나름의 독창적이고 섬세한 방식으로 매운맛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마파두부의 중국, 고추장의 한국처럼 이웃 나라들은 모두 강력한 매운맛을 자랑하는데, 유독 일본만 '매운맛의 불모지'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이 허락한 매운맛은 과연 어떤 형태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기묘한 해답이 눈 덮인 설국(雪国), 니가타현에 숨어 있다. 일본식 매운맛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전통 조미료 '칸즈리(かんずり)'다. 이름부터 낭만적이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빚어낸다'는 뜻의 칸즈쿠리(寒づくり)에서 유래한 말로, 한자로는 한조리(寒造里), 즉 '추운 마을에서 만들어낸 맛'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혹독한 자연에 맞서는 대신, 그 매서운 추위를 미식의 도구로 역이용한 설국 사람들의 지혜가 이름표에 고스란히 박혀 있는 셈이다.

고추 전래 400년, 일본은 왜 맵지 않을까
일본에 고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세기 후반 즈음이다.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음에도 일본 식탁에서 매운맛이 주류로 성장하지 못한 데에는 명확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원인은 1,200년 넘게 이어진 '육식 금지령'이다. 고추 같은 강력한 향신료는 주로 고기의 누린내를 잡거나 부패를 막는 데 쓰인다. 하지만 생선과 채소 위주의 식생활을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식재료 본연의 섬세한 맛을 살리는 육수(다시)와 간장, 된장이면 충분했다. 또한 일본 미식 문화에서 매운맛은 '맛(味)'이 아니라 미각 세포를 공격하는 '통각'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음식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대신, 우동에 시치미(일곱 가지 향신료)를 살짝 뿌려 먹듯 맛을 끌어올리는 '악센트'로만 고추를 얌전하게 소비해 온 것이다.

독기를 빼기 위해 눈밭에 고추를 던지다, '유키사라시'
하지만 온통 달고 짠 음식뿐인 일본에도,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진 놀라운 매운맛이 존재한다. 니가타현 묘코시(妙高市)에서 만들어지는 붉은 고추 페이스트 '칸즈리'다. 이 조미료의 제조 과정은 기행에 가까울 정도로 독특하고 아름답다.
여름에 수확해 소금에 절여둔 붉은 고추를, 한겨울 1월이 되면 새하얀 눈밭 위에 며칠간 무자비하게 흩뿌려 둔다. 이를 '유키사라시(雪さらし·눈 맞히기)'라 부르는데, 언뜻 퍼포먼스처럼 보이는 이 작업은 사실 치밀한 미식의 과학이다.
눈이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스펀지처럼 고추 특유의 쓴맛과 독기, 과도한 소금기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다. 동시에 얼어 죽지 않으려는 고추가 스스로 당분을 끌어올리며, 혀를 찌르는 날카로운 캡사이신의 매운맛은 어느새 기품 있는 단맛과 감칠맛으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눈밭에서 독기를 뺀 고추에 유자, 누룩(코지), 소금을 섞어 무려 3~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발효시키면 비로소 칸즈리가 완성된다.

혀를 때리지 않고 감싸 안는 '어른의 매운맛'
결론부터 말하자면 칸즈리는 우리가 아는 그 불타는 듯한 매운맛이 아니다. 타바스코 소스처럼 찌르지도, 불닭볶음면처럼 미각을 타격하지도 않는다. 은은한 매콤함 뒤에 유자의 상큼함과 3년 삭힌 누룩의 깊은 감칠맛(우마미)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 안는 '어른의 매운맛'이다. 현지 미식가들은 이 기묘한 조미료를 십분 활용해 미식의 층위를 높인다.
기름진 야키토리(닭꼬치)나 고기구이에 칸즈리를 조금 얹으면 유자의 산미가 느끼함을 깔끔하게 잡아준다. 슴슴한 나베(전골)나 오뎅 국물에 살짝 풀면 순식간에 깊고 얼큰한 국물로 변신하며, 고추냉이 대신 광어나 도미 같은 흰살생선 회에 곁들여도 훌륭한 마리아주를 보여준다. 최근에는 큐브 크림치즈 위에 살짝 얹어 와인 안주로 즐기는 퓨전 방식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가 평소 열광하는 매운맛이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강력한 '타격감'이라면, 3년의 기다림 끝에 눈 속에서 피어난 칸즈리는 미각을 다독이는 묵직한 '깊이'다. 다가오는 겨울, 칸즈리의 본고장인 눈 덮인 니가타현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현지 이자카야에 들러 따끈한 오뎅 나베나 기름진 야키토리에 칸즈리를 듬뿍 얹어 니가타산 지역 청주(지자케)와 함께 곁들여 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뻔한 고추냉이나 시치미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기품 있고 짜릿한 '어른의 매운맛'을 경험해보도록 하자.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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