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신현우 기자] 우리에게 술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호식품이다. 퇴근길 가볍게 마시는 막걸리 한 잔부터 명절이나 제사에 올리는 술까지 우리 생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술을 빚거나 마시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기도 했다. 심지어 술을 빚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술은 제사와 혼례, 잔치와 손님 접대 등 일상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약재를 넣어 빚은 술도 있었다. 이러한 술은 금주령 속에서 예외적으로 허용되기도 했다. 이번 마실 인문학에서는 술을 금지하면서도 술이 필요했던 조선의 모습과 그 속에서 전해진 약주와 곡차의 이야기를 살펴보려 한다.
곡식을 지키기 위해 내려진 금주령
농업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곡식은 백성의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쌀과 보리 등의 곡식은 주식이면서 세금을 거두고 국가의 재정을 운영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곡식은 술을 빚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쌀이나 보리로 밥과 죽, 떡을 만들었으며, 발효에 사용하는 누룩 역시 밀과 보리, 쌀 등의 곡물로 만들었다. 평년에는 감당할 수 있던 곡식의 소비도 흉년이나 가뭄으로 수확량이 줄어들면 문제가 됐다. 먹을 식량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곡식을 술로 만드는 일을 국가가 제한했던 이유다.
조선의 여러 왕은 이러한 이유로 금주령(禁酒令)을 시행했다. 태종과 세종 때에도 술을 빚고 마시는 일을 제한했으며, 흉년이나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면 금주 조치가 강화되기도 했다.
금주령에는 유교적 통치 이념도 반영됐다. 지나친 음주로 인한 낭비와 사회적 폐단을 경계했고, 재난이 발생하면 임금부터 근신하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여겼다. 시행 기간과 처벌의 강도는 당시 상황과 왕의 통치 방식에 따라 달랐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에게 술은 어떤 존재였을까.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때도, 고된 농사일 중 새참을 나눌 때도 술이 함께했다. 농주(農酒)로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농사일에 지친 몸을 달래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매개체였다.
조상에게 올리는 술은 제주(祭酒)라 했고, 제사를 마친 뒤 조상의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나누어 마시는 술은 음복주(飮福酒)라 불렀다. 혼례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술을 나누며 부부의 인연을 맺었고, 명절에는 새해를 맞아 세주(歲酒)를 마시거나 중양절에 국화주를 즐겼다.
이처럼 술이 생활과 풍습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금주령에도 일부 예외가 인정됐다. 국가의 제향이나 민간의 혼례와 제사에 필요한 술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허용되기도 했다. 특히 노인과 병자가 약으로 사용하는 술은 금주령의 예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418년(태종 18년) 1월 13일 <태종실록>에는 태종이 노인과 병자의 약 사용을 제외하고 공적·사적 연회를 모두 금하도록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약을 사용하는 일과 술을 마시는 일이 서로 맞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술을 마시기 위한 또 다른 이름, 약주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술에 약재를 넣거나 약재와 곡식을 함께 발효시켜 다양한 약용 술을 만들었다.
인삼을 활용한 인삼주(人蔘酒), 오갈피를 사용하는 오가피주(五加皮酒), 솔잎으로 빚는 송엽주(松葉酒), 구기자를 활용한 구기자주(枸杞子酒)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술은 고문헌에 제조법이 기록돼 있으며, 전통 의학에서는 건강을 돌보거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약용 술을 허용했던 금주령의 예외 규정은 술을 마시려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명분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약주(藥酒)'라는 명칭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유래설이 있다. 흉년으로 금주령이 내려지자 일부 특권층이 자신들이 마시는 청주를 약으로 사용하는 술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청주를 마시면서도 약을 복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또한, 다른 설도 있다. 선조 때 문신 서성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살던 약현(藥峴)에서 빚은 청주가 유명해 약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임원경제지>에도 서성의 집에서 빚은 좋은 청주를 약산춘(藥山春)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 오늘날의 약주와 당시의 약용 술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탁주를 가라앉히거나 걸러 얻은 맑은 술을 청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주세 제도가 정비되면서 조선의 전통적인 맑은 술은 약주로, 일본식으로 빚은 맑은 술은 청주로 구분됐다. 이러한 분류의 영향은 현대의 주세 제도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행 주세법에서도 약주와 청주는 각각 별도의 주류로 분류된다. 약주는 제조 원료와 방법 등 법률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구분되며, 약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술은 아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약으로 사용하던 약용 술의 의미와 현재 주세법상 약주의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금주령을 내린 영조가 마신 송절차
술을 차라고 부른 흥미로운 사례는 궁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여러 왕 가운데 강력한 금주 정책을 시행했던 영조가 직접 복용했던 송절차(松節茶)다.
영조는 재위 기간 여러 차례 금주령을 내렸으며, 이를 어긴 사람에게 엄격한 처벌을 적용했다. 1762년(영조 38년) 9월 17일에는 함경도 남병사 윤구연(尹九淵)이 금주령을 위반해 술을 빚었다는 혐의로 숭례문에서 처형됐다.
<영조실록>에는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가 증거물로 제출되자 영조가 크게 노해 직접 처형을 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 영조도 건강을 위해 술의 형태로 제조한 약을 복용했다. 바로 송절차다. 송절차는 소나무 마디인 송절(松節)에 우슬, 오가피 등의 약재를 넣어 술을 빚는 방식으로 만든 약용 술이었다. 이름에는 차(茶)라는 글자가 들어가지만 실제로는 발효 과정을 거쳐 제조한 술이었다.
당시 왕명의 출납과 국정 운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다리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송절차를 복용한 내용이 남아 있다. 영조는 송절차가 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신하와 의관들은 국왕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처방으로 송절차의 복용을 권했다.
강력한 금주령을 내리고 이를 어긴 사람에게 엄격한 처벌을 내렸던 영조도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술을 복용했던 셈이다. 술을 금지하면서도 치료를 위한 약용 술은 필요했던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했던 국왕조차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술의 형태로 만든 약을 복용했던 것이다. 당시 술이 지닌 약용적 가치와 국가의 금주 정책이 공존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금주령 속에서도 이어진 우리 술 문화
조선의 금주령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여러 차례 시행과 해제를 반복했다. 곡식이 부족하면 술을 빚는 일을 제한했고, 지나친 음주는 사회적 폐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술은 제사와 혼례, 노동과 휴식, 질병의 치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서 사용됐다.
술을 마시기 위해 청주를 약주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와 금주령을 내린 영조가 송절차를 복용했던 기록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술 한 잔에도 오랜 세월 쌓여온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 술 한 잔이 죄가 되던 시대에도 술을 빚고 마시는 문화가 이어졌던 이유는 술이 그만큼 우리 선조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Cook&Chef / 신현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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