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독일군 포로가 기술 전수한 부의 상징품
[Cook&Chef = 이승우 기자] 한국의 명절, 특히 추석이 다가오면 대형 마트와 백화점 매대를 화려하게 수놓는 절대적인 주인공이 있다. 바로 노란 뚜껑과 남색 캔이 상징적인 ‘스팸(통조림 햄)’ 선물 세트다. 명절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캔 햄 세트는 한국만의 독특한 명절 풍경이자, 실용적이면서도 반가운 명절 선물의 대명사다.
그렇다면 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 일본의 명절 풍경은 어떨까. 흥미롭게도 일본 역시 일 년에 두 번 있는 커다란 명절 시즌에 ‘햄’을 선물하는 문화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형태와 미식의 결은 우리의 통조림 햄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츄겐과 오세이보, 육즙을 묶어낸 ‘로스햄’
일본은 한국처럼 명절에 대규모 귀성을 하며 직접 선물을 교환하는 대신, 여름의 ‘오츄겐(お中元)’과 연말의 ‘오세이보(お歳暮)’ 시즌에 감사한 분들께 택배로 계절 인사를 띄운다. 이 시기 일본 백화점 식품관의 가장 명당자리를 차지하는 품목이 바로 묵직한 ‘덩어리 햄’이다.
일본어로는 주로 ‘로스햄(ロースハム)’ 혹은 ‘본레스 햄(ボンレスハム)’이라 불리는데, 통조림 캔 대신 돼지의 등심이나 뒷다릿살을 큼직하게 통째로 훈연한다. 이때 고기 덩어리를 굵은 조리용 면실로 단단하고 촘촘하게 묶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단순히 예쁜 원통형 모양을 잡기 위함이 아니다. 가열과 훈연 과정에서 고기 섬유가 수축하며 뒤틀리는 것을 막고, 결을 강하게 밀착시켜 고기 본연의 육즙이 빠져나가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함으로써 썰었을 때 부서지지 않는 쫀득한 식감을 완성하기 위한 전통 방식이다.

독일군 포로가 전수한 기술, ‘사회인’의 상징이 되다
일본 햄 선물의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 수용되었던 독일군 포로 중 식육 마이스터들이 정통 소시지와 햄 제조 기술을 전수했고, 이를 일본인의 입맛에 맞춰 짠맛을 줄이고 부드럽게 개량한 것이 ‘로스햄’의 시작이다. 고기가 귀했던 과거 쇼와 시대에는 이 실로 묶인 거대한 고기 덩어리가 그 자체로 부유함의 상징이자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이었다.

이러한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굳어져, 오늘날 일본에서는 5천 엔에서 1만 엔(약 4만 5,000원~9만 원) 선의 고급 로스햄 세트가 명절 선물의 클래식이 되었다. 특히 이제 막 취업을 한 초보 직장인들이 고향의 부모님께 “저 이제 제 몫을 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며 보내는 든든한 ‘사회인(社会人)의 증명서’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거운 의무감보다는, 번듯한 어른의 문턱을 넘었음을 알리는 산뜻한 인사인 셈이다.
얇게 썰어 굽는 한국, 두툼한 ‘스테이크’로 즐기는 일본
선물의 형태가 다르니 이를 식탁에 올리는 방식도 판이하다. 한국에서 캔 햄은 얇게 썰어 팬에 노릇하게 구운 뒤, 갓 지은 쌀밥 위에 얹어 먹는 짭조름한 ‘밥도둑’의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 일본의 덩어리 햄은 식탁의 서브 반찬이 아닌 근사한 ‘메인 요리’로 대우받는다. 명절에 로스햄을 선물 받은 일본 가정에서는 겉면을 감싼 실을 툭툭 끊어내고 1~2cm 두께로 아주 두툼하게 썰어낸다. 그리고 달궈진 팬에 버터를 약간 두르고 겉면이 짙은 갈색이 될 때까지 구워내 ‘햄 스테이크(ハムステーキ)’를 완성한다. 칼과 포크를 쥐고 썰어 먹는 햄 스테이크는 훈연 향과 꽉 갇혀있던 육즙이 살아있어 훌륭한 밥반찬이자 연말연시 술안주로 제격이다.

한국의 캔 햄과 일본의 덩어리 햄. 형태도 먹는 방식도 다르지만, 두 나라 모두 서구에서 건너온 가공육을 자신들만의 식문화로 완벽하게 체화했다.
아쉽게도 바다 건너 우리에게는 연말 오세이보 시즌에 맞춰 이 번듯한 햄 덩어리를 택배로 띄워 보낼 현지의 ‘직장인 자식’이 없다. 그러니 다가오는 가을과 겨울, 일본 여행을 간 김에 백화점 식품관에 들러 스스로를 위한 ‘내돈내산’ 선물을 골라보는 것을 권장한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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