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한계를 넘어 탄생한 우리 혼양주
[Cook&Chef = 신현우 기자] 잠시 더위를 식혀줄 듯 내리던 장맛비는 어느새 그치고, 다시 뜨거운 햇볕이 자리를 채웠다. 비가 지나간 뒤의 습기까지 더해지면서 무더위는 연일 고점을 높여가고 있다. 사람은 쉽게 지치고 음식은 금세 상하기 쉬운 계절, 술 역시 이러한 여름의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냉장시설도,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양조 설비도 없던 과거에는 여름이 술을 빚고 보관하기 가장 까다로운 시기였다. 높은 기온은 발효를 빠르게 진행시켰고, 정성껏 빚은 술이 시어지거나 변질되는 일도 잦았다. 그럼에도 선조들은 무더운 계절이라고 해서 술 빚는 일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여름을 견딜 수 있도록 술 빚는 방법을 달리했고, 그렇게 탄생한 술이 바로 과하주(過夏酒)다.
여름을 지나기 위해 태어난 술
과하주의 역사는 조선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실록』에는 1418년 태종이 신하들에게 “여름을 지낼 술(과하지주)을 이 도읍(개성)에서는 많이 빚을 수 있기 때문인가?” “한경(서울)에서 또한 과하주를 빚을 수 있으리라”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 구체적인 제조법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적어도 15세기 초에는 과하주라는 이름의 술이 도성에서 통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과하주가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미 당대 사람들이 알고 즐기던 술이었던 셈이다.
구체적인 제조법은 조선 후기의 조리서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17세기경 쓰인 『음식디미방』에는 누룩을 끓여 식힌 물에 하룻밤 담가 누룩물을 만들고, 찹쌀로 지은 고두밥을 섞어 술을 빚은 뒤 사흘가량 지나 좋은 소주를 붓는 방법이 기록돼 있다. 이후 7일이 지나면 마실 수 있으며 그 맛을 ‘독하고 달다’고 표현했다.
『증보산림경제』와 『규합총서』 등의 여러 문헌에서 과하주 빚는 법을 담고 있다. 문헌마다 쌀, 누룩, 물과 소주의 비율은 물론, 소주를 넣는 시기에도 차이가 있다.
발효주와 증류주가 만나다
과하주의 핵심은 발효주와 증류주의 결합이다. 누룩 속 미생물과 효소는 쌀의 전분을 당으로 바꾸고, 효모는 이 당을 먹으며 알코올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도중 도수가 높은 소주를 넣으면 술 전체의 알코올 농도가 빠르게 올라가면서 효모를 비롯한 미생물의 활동이 크게 억제된다.
그 결과 발효가 느려지거나 사실상 멈추면서 미처 알코올로 바뀌지 않은 당분이 술에 남는다. 과하주에서 느껴지는 농밀한 단맛은 단순히 꿀이나 설탕을 넣어서가 아니라 쌀에서 유래한 당분이 남아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높아진 알코올 도수는 잡균의 증식을 억제해 일반적인 발효주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단맛과 도수, 발효 정도는 소주를 넣는 시점과 양조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과하주는 흔히 포르투갈의 포트와인이나 스페인의 셰리와인과 비교된다. 포도주에 브랜디와 같은 증류주를 더해 도수를 높이는 주정강화와인과 기본 원리가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하주는 포도가 아닌 쌀과 누룩을 사용하고, 여기에 곡물로 만든 소주를 더한다는 점에서 우리 고유의 발효문화와 증류기술이 결합된 술이다.
따라서 과하주를 단순히 ‘한국식 포트와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낯선 술을 이해시키는 비유로는 유용하지만, 과하주는 발효주와 증류주를 함께 사용해 새로운 술을 완성하는 우리 술의 ‘혼양주(混釀酒)’ 문화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특히 이러한 혼양주 문화는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과하주보다 이른 기록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모든 과하주가 같은 술은 아니다
과하주를 이야기할 때 경상북도 김천의 과하주도 빼놓기 어렵다. 다만 김천 과하주는 일반적인 과하주와 이름의 유래와 제조법이 다소 다르다. 김천에서는 남산동에 있던 과하천의 물로 술을 빚었기 때문에 과하주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김천 과하주는 과하천의 물과 찹쌀, 누룩으로 빚어 오랫동안 숙성한 지역 술로 알려져 있다. 발효주에 소주를 넣어 여름을 나게 한 일반적인 과하주와는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같은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지역의 역사와 양조법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과하주는 여름에만 빚거나 여름에만 마시는 술이 아니다. 이름에 담긴 ‘과하’는 더운 날 시원하게 마시는 계절주라는 의미보다 술이 상하기 쉬운 여름을 무사히 건넌다는 뜻에 가깝다. 봄에 빚어 여름을 지나 보관하거나, 온도가 높은 계절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술을 즐기기 위해 고안된 양조기술이었다.
오늘날에는 냉장설비와 온도제어 기술이 발달해 계절 때문에 술을 빚지 못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그럼에도 과하주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발효주가 지닌 부드러운 질감과 곡물의 단맛, 증류주가 지닌 높은 도수와 향이 한 술 안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양조와 증류를 모두 이해해야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과하주는 우리 술 문화가 축적해 온 기술의 깊이를 보여준다.
술에 술을 더해 만든 과하주 안에는 술의 변화를 관찰하고, 계절의 한계를 넘어 더 오래 보관하려 했던 선조들의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다. 과하주는 단순히 여름을 견딘 옛 술이 아니다. 발효를 조절하고 보존성을 높이며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 계절을 다루는 우리 고유의 양조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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