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정체성을 지켜가는 엄마와 아들
[Cook&Chef = 조소현 기자] 1990년대, 남편을 여읜 미혼모 소영(최승윤 역)은 어린 아들 동현(황도현 역)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낯선 나라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던 두 모자의 이야기이다.
캐나다로 이민 온 후 처음 학교에 간 동현이 엄마가 싸준 김밥 도시락을 열자, 반 친구들은 김밥에서 방귀냄새가 나고 역겹다며 놀려댄다. 상처받은 동현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화장실에 그대로 쏟아 버린다.
이후 동현은 아이들에게 ‘라이스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쌀 먹는 애’라는 뜻의 이 말은 한국 음식을 먹는 소년을 놀리는 인종차별적인 멸칭이다. 영화 제목인 ‘라이스보이(Riceboy)’는 바로 동현이 차별 속에서 얻은 이름이다.
과거 서구권으로 이민 간 한인들에게 음식은 낯선 사회에 적응하며 마주한 큰 장벽 중 하나였다. 1990년대만 해도 북미에서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고, 한국 음식은 생소하다는 이유만으로 놀림과 차별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당시 캐나다의 아시아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음식의 냄새를 두고 놀림을 받았던 사례가 있다. 일부는 친구들에게 ‘이상한 음식’ 때문에 놀림받지 않기 위해 부모에게 샌드위치나 피자처럼 주류 백인 학생들이 먹는 ‘평범한’ 도시락을 싸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현상을 ‘런치박스 셰이밍(lunchbox shaming)’이라고 명명한다. 음식이 가정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롱은 결국 자신이 속한 문화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밥 사건’ 이후 동현은 엄마에게 다른 아이들처럼 '한국 음식이 아닌 것'을 도시락으로 싸달라고 부탁한다. 새로운 사회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음식부터 바꾸려 한다.
소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소영은 새로 온 한국인 동료를 만나 함께 도시락을 먹는다. 동료는 샌드위치를 싸온 소영이 백인 같다며 신기해하고, 이제 막 이민 온 동료는 젓갈을 싸왔다. 소영은 오랜만에 먹는 젓갈을 반가워하면서도 샌드위치와 함께 먹으니 맛이 어색하다고 느낀다.
그런 소영과 동현에게 집은 세상의 눈을 피해 온전히 한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동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겉절이를 함께 만들고, 식탁에는 겉절이와 수육, 김과 쌀밥, 국이 오른다.
바깥에서는 차별의 이유가 됐던 음식이 집 안에서는 두 사람을 이어준다.
소영은 자신이 기억하는 한국의 맛을 아들에게 먹이며, 엄마의 사랑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정체성을 물려준다.
감독 앤소니 심은 8살에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간 자신의 경험을 영화에 담았다. 어린 시절 김밥과 컵라면을 먹는다는 이유로 놀림 받곤 했다고 한다.
감독은 촬영 당시 백인 스태프들이 과거 한식이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할 정도로 한식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혐오 식품’ 취급을 받던 과거를 까맣게 잊은 듯, 지금의 한식은 신드롬이라 할 만큼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한식의 위상이 격변한 세월 안에는, 입맛마저 숨겨야 했던 이민자들의 서러움이 녹아있다.
멸칭이었던 ‘라이스보이’에 감독은 ‘슬립스(Sleeps)’라는 단어를 붙였다. 낯선 땅에서 당한 차별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소년이 자신의 뿌리를 마주하고, 비로소 마음의 위로와 휴식을 얹는다는 의미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 음식은 이민자로 살아가며 겪었던 차별과 상처,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감춰야 했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동시에 음식은 떠나온 고향의 기억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붙잡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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