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에 녹는 성질로 누린내를 덮는 재주도
지난 겨울, 지방에서 일을 보다가 점심때를 맞았다.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처럼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보통은 밥때가 되면 별점과 리뷰를 검색해 식당을 정하지만, 이날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눈에 띄는 곳으로 그냥 들어갔다. 어디서나 만만한 메뉴인 만둣국을 시켰다. 내 맛도, 네 맛도 아니구나 하며 대충 숟가락을 놀리는데, 후추 향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국물을 이리저리 휘저어보니 바닥에 시꺼멓게 후추가 깔려 있었다.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육수의 누린내가 얼마나 심했으면 후추를 이토록 많이 쏟아 부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15~17세기 서유럽 사람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왕실의 결혼 지창금이나 건물 임대료로 쓰일 만큼 귀했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세계 열강이 전쟁까지 불사했던 '검은 황금' 후추. 어떻게 이 귀했던 향신료가 2026년 한국의 한 식당에서 음식마다 푹푹 퍼 넣어도 될 만큼 흔하디흔한 재료가 된 것일까?
알싸한 매운 맛과 향, 후추의 매력
후추(Piper nigrum)는 인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의 고온 다습한 열대 지역에서 큰 나무를 타고 자라는 덩굴성 식물이다. 흰 꽃이 피었다 지고 나면 포도송이처럼 열매가 맺히는데, 익어가면서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한다. 이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와 가공 방법에 따라 흑후추, 백후추, 적후추 등 색과 풍미가 다른 후추가 만들어진다.
후추의 핵심은 특유의 매운맛과 풍미를 내는 유기화합물인 ‘피페린(Piperine)’이다. 혀의 맛봉오리보다는 통증 수용체를 자극해 개운한 매운맛과 은은한 온열감을 준다. 후추를 갓 갈았을 때 퍼지는 독특한 향이 머릿속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것도 이 성분 덕분이다.
또한 피페린은 지용성이어서 고기의 지방 성분과 잘 섞이며 누린내를 화학적으로 감싸 안는다. 특유의 알싸함이 불쾌한 냄새와 잡다한 맛에 대한 신경 자극을 완화해 주는 것이다. 사실 고기에서 누린내가 난다는 것은 불포화지방산이 산소와 만나 산패되었다는 신호다. 신선한 고기와 육수를 사용한다면 후추를 국자로 쏟아 부을 이유가 없다. 그저 완성된 음식에 톡톡 두 번만 뿌려도 특유의 풍미가 육수와 조화를 이루며 훌륭한 요리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의 시작, 후추
역사적으로 후추의 가치는 상상 초월이었다. 귀한 것을 얻으려면 큰 희생이 필요한 법.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무역로를 통제하고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자, 인도에서 출발한 후추는 유럽에 도착하면 가격이 수백 배로 뛰어 ‘검은 황금’이라 불릴 만큼 막대한 부의 상징이 되었다.
16세기초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 성공 이후, 유럽인들은 후추, 육두구, 정향 등이 요리에 이국적인 풍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열을 내려주는 약재로, 또 음료로도 효용이 크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은 지중해를 거치지 않는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하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본격적으로 ‘후추 길’을 개척하기 위한 탐험이 시작된 것. 이 과정에서 유럽 열강들은 서로 우위를 점하고자 해상전을 벌였다. 후추에 대한 열망이 식민 지배, 노예제, 학살 등의 참담한 결과를 만들면서까지 서양 제국들은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을 식민지로 삼아 대량의 후추를 유럽으로 직접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도 14세기 초 고려 충렬왕 시기에 송나라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후추가 처음 들어왔다. 당시에는 소화를 돕고 기혈을 순환시키는 귀한 약재였고, 조선시대 왕실 잔치 기록서인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식재료 목록을 봐도 곳곳에 ‘호초胡椒’가 등장할 정도로 음식에도 조금씩 사용했다. 아마도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자라지 않는 식물이라서 희귀했으니 왕실 및 고위 관료들 사이에 사치품으로 통했을 것이다.
플랜테이션 농업과 분말 후추의 등장
해상 무역로의 다변화가 이뤄지면서 유럽 국가들이 앞다투어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후추를 유럽으로 직접 나르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 등으로 후추 공급량은 대폭 증가했다. 거기에 유럽 열강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동남아시아 열대 기후 지역 전역에 후추를 대량 이식해 플랜테이션 농업을 본격화했다.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공급이 늘자 후추 가격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베트남, 브라질 등 신흥 생산국들이 집약적 재배 기술과 효율적 병충해 관리법을 도입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늘었고, 가루 형태로 장기 보관이 가능한 분말 제형이 대량 생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오뚜기 순후추’ 출시로 누구나 부담 없이 후추를 사서 쓸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후추는 더 이상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검은 황금’이 아니다. 어느 식당에서나 편하게 쓸 수 있는 평범한 양념이다. 하지만 그 흔함 뒤에는 세계의 지도를 바꾸고 인류의 식문화를 뒤흔든 거대한 역사가 숨어 있다. 허름한 식당에서 과도하게 사용된 후추를 바라보며 문득 지나친 풍요가 도리어 향신료 본연의 고귀한 가치와 신선한 식재료의 본 맛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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