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이승우 기자] 한 나라의 식문화는 단순히 식재료의 풍부함이나 미식적 쾌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음식을 입에 넣는 주체가 어떤 시대적 배경에 놓여 있는지, 또 어떤 극한의 환경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 그 형태와 맛은 극적으로 진화한다. 그렇다면 매일 칼을 차고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던 일본의 무사들, 즉 ‘사무라이(侍)’의 식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화려한 기교와 정갈함으로 대표되는 현대 일본 요리(화쇼쿠)의 이면에는, 철저히 ‘생존’과 ‘전투 효율’에 초점을 맞췄던 사무라이들의 투박한 전투 식량이 숨어있다.

전장의 만능 구급약 ‘우메보시’와 최초의 인스턴트 ‘미소환’
언제 적의 기습이 닥칠지 모르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사무라이들의 식사 1원칙은 ‘기동성’과 ‘보존성’이었다. 이때 그들의 허리춤을 든든하게 지켜준 핵심 식재료가 바로 ‘우메보시(매실 장아찌)’와 ‘미소(된장)’였다.
극도로 짠맛과 신맛을 내는 우메보시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군수물자’이자 ‘만능 구급약’이었다.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같은 당대의 명장들은 영지 곳곳에 매실나무를 심도록 엄격히 장려했을 정도다. 무사들은 행군 중 흙탕물을 마셔야 할 때 우메보시를 넣어 살균했고, 칼에 베여 상처가 났을 때는 과육을 짓이겨 발라 상처가 곪는 것을 막았다. 특히 매복이나 행군 중 물이 떨어졌을 때, 우메보시를 바라보거나 입에 살짝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여 갈증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생존 아이템이었다.

또 다른 필수품은 ‘미소다마(味噌玉, 된장환)’였다. 무사들은 마른미역이나 가쓰오부시 가루를 섞은 된장을 불에 구운 뒤, 둥글게 빚어 말려 다녔다. 야전 냄비에 물을 끓여 이 환을 툭 던져 넣기만 하면 즉석에서 단백질과 염분을 듬뿍 채워주는 국물 요리가 완성됐다. 현대인들이 즐겨 먹는 ‘인스턴트 된장국’의 기원이 바로 사무라이의 전투 식량인 셈이다.

‘거친 현미’ 먹던 전사들, 평화가 부른 ‘백미’의 비극
사실 사무라이들이 처음부터 새하얀 쌀밥에 우메보시를 곁들여 먹었던 것은 아니다. 전투가 일상이던 시절, 이들의 주식은 도정하지 않은 거친 ‘현미’나 조, 피 같은 잡곡이었다. 여기에는 비타민 B1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반찬으로 우메보시나 된장만 곁들여도 영양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비극은 전쟁이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로운 에도 시대가 열리면서 시작됐다. 갑옷을 벗고 도시로 모여든 사무라이들에게는 씹기 불편한 현미 대신, 뽀얗게 도정된 ‘백미(흰쌀밥)’를 마음껏 먹는 것이 신분과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비타민 B1이 전부 깎여나간 백미를 산처럼 쌓아두고, 정작 반찬은 예전처럼 우메보시나 단무지 한두 조각만 곁들이는 식습관이 굳어진 것이다.
그 결과 극단적인 영양 불균형으로 인해 ‘각기병(脚氣病)’이 창궐했다. 당시 에도의 수많은 무사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 픽픽 쓰러졌고, 사람들은 이를 에도에서만 걸리는 병이라 하여 ‘에도와즈라이(江戸患い, 에도병)’라 불렀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는 거뜬히 살아남았던 전사들이 평화로운 시절의 ‘흰쌀밥’ 앞에서는 맥없이 목숨을 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백미 중심의 식습관이 낳은 비극은 훗날 근대 일본 해군까지 이어졌고, 병사들의 각기병을 해결하기 위해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은 ‘해군 카레’를 전격 도입하면서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생존의 맛에서 미식의 절정으로, 와카야마현 ‘기슈 난코우메’
과거 전장에서 사무라이들의 생명을 연장해 주던 투박한 우메보시는 세월이 흘러 지역의 자연환경을 머금은 최고급 미식으로 진화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일본 최대 매실 산지인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특산물 ‘기슈 난코우메(紀州南高梅)’다.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에서 자란 난코우메는 껍질이 종이처럼 얇고 과육이 두툼해 입안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린다. 최근에는 꿀을 더해 짠맛을 줄인 ‘하치미쓰(꿀) 우메보시’ 등이 등장해 밥도둑을 넘어 고급 다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새하얀 쌀밥 정중앙을 지키는 붉은 우메보시 한 알과 짭조름한 즉석 된장국, 그리고 각기병을 몰아낸 카레라이스까지. 수백 년 전 전사들의 밥상은 오늘날 ‘현대사회’라는 또 다른 팍팍한 전장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묵묵히 데워주는 든든한 소울푸드로 굳건히 명맥을 잇고 있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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