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오뚜기 ‘순후추’ 등장으로 대중화
[Cook&Chef = 신혜연 칼럼니스트] 아마도 1992년, 남산 ‘라쿠치나’였을 거다. 크림수프가 나왔는데, 웨이터가 다가와 큰 나무 봉 같은 걸 들고 수프 위에 무언가를 갈아 넣기 시작했다. 뭐냐고 물으니 후추라고 했다. 후추는 원래 가루 아니냐? 후춧가루를 왜 저렇게 넣느냐고 되묻자, 통후추를 그 자리에서 직접 갈아 넣어야 훨씬 맛이 좋다고 답했다. 실제로 그 후추 향은 내가 이전까지 알던 그 후춧가루의 향이 아니었다. 상큼하면서도 알싸하고, 매콤하면서도 이국적인 풍미가 코끝을 감쌌다. ‘아, 후추가 원래 이런 거였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내 상식 속 후추는 분말 형태의 후춧가루뿐이었다. 후추가 땅에서 나는지 바다에서 나는지는 관심조차 없었고, 후춧가루는 태어날 때부터 가루인 줄로만 알았다. 어린 시절, 미8군 부대 매점(PX)에서 유출된 물건을 들고 집집마다 찾아오던 ‘미제 아줌마’ 가방 속의 후추가 내 인생 첫 후추였으니까. ‘거버 이유식, ‘허시 초콜릿’, ‘스팸’ 사이에서 존재감을 비추던 ‘맥코믹McCormick 후추’ 말이다. 엄마는 이 맥코믹 후춧가루를 만능 양념이라 부르며 음식마다 조금씩 치곤 했다. 가격도 그리 싸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조선시대 후추 가격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선조 때 일본 사신이 연회장에서 후추 주머니를 풀자 기생과 악공들이 이를 줍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류성룡의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 당시 후추가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1974년, 오뚜기에서 빨강과 노랑의 직사각형 캔에 담긴 ‘순후추’를 대량 생산하며 우리집 찬장의 ‘맥코믹 후추’도 ‘오뚜기 순후추’에게 자연스레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가정식에 후춧가루가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후추=가루’로 알고 살던 내게 ‘라쿠치나’의 후추 그라인더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후추는 원래 갈아먹는 거였어? 그럼 원래 어떻게 생긴 건데? 땅콩처럼 땅에서 캐나? 호두처럼 나무에 열리나? 저 딱딱한 게 어떻게 가루가 되지? 인터넷도, AI도 없던 시절이라 웨이터에게 부탁해 실물 통후추를 구경하고, 도서관에서 백과사전을 찾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후추는 덩굴성 식물의 열매이며, 미리 갈아둔 가루보다 갓 갈아 썼을 때 맛과 향이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당장 집에서 통후추를 갈아 먹지는 못했다. 당시만 해도 통후추나 그라인더를 구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네 찬장 풍경은 참 많이 달라졌다. 후추와 소금 그라인더를 놓고, 암염도 갈고, 통후추도 갈아서 요리를 하는 분들이 꽤 많다.
“후춧가루가 편한데 왜 굳이 통후추를 갈아 먹느냐”고 묻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갓 갈아낸 통후추가 음식 위에서 터뜨리는 향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다면 그 질문이 우문이라는 걸 금세 깨닫게 된다. 인스턴트 봉지 커피를 타 마시던 우리가 이제는 집에서 원두를 직접 갈아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슈퍼마켓 매대에 진열된 후추의 종류도 아주 많아졌다. 사각 캔에 담긴 ‘오뚜기 순후추’를 넘어, 다양한 품종의 통후추와 그라인더 일체형 제품들, 후춧가루들이 여러 형태의 용기에 담겨 진열되어 있다. 고온 다습한 열대 기후에서 나무나 지주대를 타고 위로 자라는 덩굴성 식물인 후추는 10미터 이상 줄기가 뻗어 나가다가 흰색과 연녹색 꽃들이 줄지어 핀다. 꽃이 지고나면 포도송이처럼 작은 알갱이 형태의 열매가 빽빽하게 맺힌다. 열매가 녹색에서 노란색, 붉은색으로 변하면 다 익은 것이다. 흥미롭게도 수확 시기와 가공 방식에 따라 후추의 색과 향,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
열매가 아직 녹색일 때 덜 익은 녹색 열매를 동결건조하거나 염장하면 신선하고 상큼한 향이 나는 녹후추가 되고, 그 녹색 열매를 그대로 햇볕에 말리면 껍질이 검게 오므라들며 매운맛과 향이 강한 흑후추가 된다. 잘 익은 붉은 열매를 그대로 건조하면 미묘한 단맛과 부드러운 매운맛을 내는 적후추가 되고, 붉은 열매의 껍질을 물에 벗겨내고 씨앗만 말리면 부드럽게 깔끔한 풍미의 백후추가 된다.
이 중 우리가 주로 쓰는 것은 흑후추와 백후추다. 대개 음식의 색에 따라 후추를 선택하는데, 붉은 고기 요리에는 묵직한 향의 흑후추를 사용하고, 흰살생선이나 샐러드, 맑은 국물에는 입자가 눈에 띄지 않도록 백후추를 사용하는 식이다.
가루내지 않고 통후추 형태 그대로 사용하는 요리도 많다. 육수를 끓일 때 마늘, 생강 등과 함께 통후추를 알갱이째 넣으면 국물이 탁해지지 않고 깔끔한 향을 쓸 수 있다. 피클을 담글 때도 마찬가지다. 겨울철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끓여 마시는 ‘배숙’도 배에 통후추를 박고, 생강 편을 우려낸 꿀물에 끓여 마시는 것인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이 국물을 자작하게 졸여 농축시켜서 ‘향설고香雪膏’라는 이름의 고급 궁중 디저트로 사용했다고 한다.
후추 이야기를 한참 풀어나가다 보니, 이상하게 코끝에 알싸한 후추 향이 계속 머물러 있는 듯해 기분이 한결 상쾌하다. 통후추를 그라인더로 직접 갈 때 터져 나오는 피페린 성분과 휘발성 오일의 향이 뇌를 자극해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준 덕분인 듯하다. 일을 하다가 나른해지는 오후, 혹은 머리가 지칠 때 통후추를 한번 갈아보자. 저녁 요리에 쓸 신선한 후추도 미리 준비하고, 졸리던 정신도 번쩍 깨어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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