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첫선...소주와 말아 마시는 레트로 감성

[Cook&Chef = 이승우 기자] 술은 그 시대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비추는 거울이다. 일본 유학 시절, 한 동기가 "한국인은 술을 잘 마시지 않냐"며 호기롭게 술 대결을 신청해 온 적이 있다. 그때 그가 비장한 무기처럼 꺼내 든 것이 바로 '호피(ホッピー·Hoppy)'라고 적힌 갈색 병이었다. 마셔도 마셔도 동기가 좀처럼 취하지 않았던 비결은 바로 그 병 안에 있었다.
맥주의 외관을 감쪽같이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호피는 알코올 도수 0.8%의 맥아 발효 음료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꽤나 톡톡 튀는 신세대 음료 같지만, 이 작고 쌉싸름한 음료의 기원을 알기 위해선 1940년대 전후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맥주가 사치품이었던 시대, 서민의 지혜로 탄생한 '꿩 대신 닭'
1948년 처음 탄생한 호피는 맥아와 효모를 발효시켜 맥주와 흡사한 풍미를 내지만, 알코올 도수는 0.8%에 불과한 '맥주 맛 음료'다. 패전 직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 속에서 진짜 맥주는 서민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당시 주머니 사정이 가벼웠던 노동자들은 저렴하고 독한 갑류 소주에 이 호피를 섞어 마시며 맥주를 향한 갈증을 달랬다. 거친 소주의 맛을 부드럽게 중화하고 청량감을 더해주는 일종의 믹서(Mixer) 역할을 한 것이다. 훗날 경제가 고속 성장하며 진짜 맥주가 대중화되었지만, 호피는 특유의 향수와 레트로한 감성을 무기로 도쿄 서민 상권의 터줏대감으로 굳건히 살아남았다.

'나카(中)'와 '소토(外)', 소비자가 완성하는 주류 페어링
호피가 가진 외식 비즈니스적 매력은 독특한 제공 방식에 있다. 호피를 주문하면 유리병에 담긴 호피 음료 자체인 ‘소토(外)’와, 얼음 잔에 담긴 맹렬한 소주인 ‘나카(中)’가 따로 제공된다. 손님은 자신의 주량과 입맛에 맞춰 소토와 나카의 비율을 직접 조절해 섞어 마신다.
이는 매장과 소비자 모두에게 합리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통상적으로 소토(호피) 한 병의 양은 나카(소주) 한 잔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손님은 호피 한 병으로 소주만 2~3회 추가 주문(나카 오카와리)하며 저렴하게 술자리를 이어갈 수 있다. 식당 입장에서도 객단가는 낮지만 주류의 추가 주문을 지속적으로 유도할 수 있어 훌륭한 수익 모델이 되어 주었다.

전통 음료에서 '요즘 음료' 로 진화
수십 년간 아저씨들의 술로 여겨지던 호피는 최근 현대적인 외식 트렌드와 맞물려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통풍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맥주와 달리 ‘퓨린 제로(0)’인 데다, 일반 맥주 대비 칼로리가 약 4분의 1 수준으로 낮고 당질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주류 업계 전반에 퓨린이 없는 맥주 상품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는 형국이지만, 호피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를 구현해 낸 원조격 음료다. 고물가 시대에 가성비를 찾으면서도 건강한 미식을 추구하는 이른바 ‘요즘’ 세대에게, 호피는 살 안 찌고 깔끔한 술로 재조명받으며 젊은 층의 테이블까지 점령하고 있다.
도쿄 여행 중 허름한 이자카야를 마주한다면, 묵직한 스지(소힘줄 조림)에 호피 한 잔을 곁들여 보자. 단순히 '가짜 맥주'라고 치부하기엔, 꽤나 '진짜' 로컬 음료로서 존재해 온 궤적이 길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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