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의 가을 참게는 시와 노래가 된다
[Cook&Chef = 염상균 칼럼니스트] 게 한 마리가 시가 되고, 한 접시의 게가 한 선비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에게 게는 각별한 음식이었다. 그는 서리가 내리고 강촌의 계절이 깊어지는 때, 살과 장이 오른 게 한 마리에서 자연의 때를 읽고 사람의 정을 느꼈다. 술잔 곁에 게를 놓고 옛사람의 풍류를 떠올렸으며, 값비싼 고량진미보다 소박한 제철 음식에 마음을 기울였다. 서거정의 게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가 「야경(野逕)」이다.
野逕當秋晚/江村味亦長/水寒魚尾白/霜落蟹臍黃/秔飯炊初軟/秫醪釀更香/已宜謀口腹
何必羨膏梁
“가을 늦은 들길에, 강촌의 맛 또한 깊어지고, 물이 차가워지니 물고기 꼬리가 희어지고, 서리가 내리니 게의 배가 누렇게 찬다. 갓 지은 멥쌀밥은 부드럽고, 빚은 술은 더욱 향기롭다. 이제 입과 배를 즐겁게 하면 되었으니, 어찌 기름진 고량진미를 부러워하랴.”
특히 눈길을 끄는 구절이 ‘霜落蟹臍黃’, 곧 ‘서리가 내리면 게의 배가 누렇게 된다’는 표현이다. 흔히 이를 ‘노랗게 차오른 게장’으로 풀어내지만, 원문에는 게장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 게의 배 쪽에 장이나 알이 차오른 모습을 서리와 연결해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 대목을 오늘날의 꽃게 간장게장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수다.
강촌의 가을, 게가 익어 가는 계절
서거정이 그린 공간은 ‘江村’, 곧 강촌이다. 차가워진 물과 물고기, 서리를 맞은 게, 갓 지은 밥과 햇술이 한 폭의 가을 풍경처럼 이어진다. 바닷가에서 잡은 게를 떠올리기보다는 강과 논, 하천을 오가는 민물게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조선시대의 ‘게’는 오늘날처럼 꽃게를 대표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게장에는 민물게인 참게가 중요한 재료로 쓰였다. 『산림경제』·『규합총서』·『주방문』·『시의전서』 등에는 다양한 게장법을 기록하였다. 특히 가을철 알과 장이 오른 암게를 귀하게 여겼으며, 게를 절여 오래 저장해 반찬으로 먹었다. 이런 식문화의 배경에서 보면 서거정이 “서리가 내리니 게의 배가 누렇게 찬다”고 노래한 까닭도 짐작할 수 있다. 늦가을은 게가 살찌고 장과 알이 차오르는 계절이다. 서리는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라 맛이 무르익었다는 자연의 신호였다.
게 한 마리에 담긴 사람의 정
서거정은 게를 혼자만의 별미로 즐긴 사람도 아니었다. 『사가집』에는 게를 소금에 절여 먹는 음식에 관한 시도 나온다. 「촌주팔영(村廚八詠)」 가운데 「해염(蟹鹽)」은 살아 움직이던 게가 소금에 절여져 진수성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모습을 노래한다.
當年郭索且蹣跚/那料沉虀五鼎間/獨殼雙螯俱有味/也宜黠酒更加餐
“그때는 느릿느릿 기어 다니던 게가 어찌 소금에 절여져 진수성찬 사이에 오를 줄 알았으랴. 단단한 껍데기와 두 집게발도 모두 맛 들었으니 술과 함께 먹으면 더욱 좋구나.”
여기서 ‘침제(沉虀)’는 게를 소금 등에 절인 게젓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간장게장과 조리법은 다르겠지만, 게를 절여 저장하고 밥상에 올리는 음식문화가 조선시대에도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후대의 음식 관련 책에는 간장뿐 아니라 소금, 술, 식초 등을 이용한 게장법들이 등장한다.
서거정에게 게는 술과도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살을 발라 먹는 즐거움, 술잔을 기울이며 계절을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한데 어우러졌다. 음식이 배를 채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풍류가 되었다.
참게도 수꽃게도 가을이 절정
간장게장은 짭짤하면서도 고소하고 달다. 양념게장은 매콤하면서도 달아 입맛을 끈다. 게장은 손으로 들고 살을 빨아야 제맛이 나고, 마지막에는 게딱지에 밥을 넣어 비벼 먹어야 제대로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식탁에서 손에 묻는 번거로움을 싫어했던 나는 오랫동안 게장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작은 토막 하나를 가져다 우물우물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게장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서거정처럼 게를 앞에 놓고 술 한 잔 기울이며 풍류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게장 하면 먼저 꽃게를 떠올린다. 그러나 서거정의 시 속 게를 굳이 꽃게로 특정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강촌’이라는 공간과 조선시대 게장 문화의 전통을 고려하면 민물게, 특히 참게류를 떠올리는 편이 자연스럽다. 참게든 바닷게든 맛 좋은 게가 제철을 만나는 순간은 같다.
서리가 내린 늦가을, 강물은 차가워지고 게의 배는 노랗게 찬다. 밥은 부드럽게 익고 술은 향기를 더한다. 그 밥상 앞에서 서거정은 값비싼 진수성찬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게 한 마리와 밥 한 그릇, 술 한 잔이면 충분했다. 계절이 익어 가는 자연의 맛,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의 정, 그리고 욕심을 덜어낸 한 끼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의 게는 오늘도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조선 선비가 삶을 맛보던 한 편의 시이다. 이제 9월, 가을로 접어든다. 수꽃게도 참게도 제철이어서 그 맛도 절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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