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 제공 / Cook&Chef 제작
여름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가을의 문턱을 알릴 때쯤, 우리 마음속에는 어김없이 둥근 보름달이 차오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이 소박한 속담 속에는 비단 물질적 풍요뿐만이 아닌, 쾌청한 날씨와 고된 노동 후의 달콤한 휴식,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운 이들과 함께하는 충만한 시간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보름달처럼 ‘가득 참’의 뜻을 지닌 한가위(추석)는 햅쌀과 햇과일로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날이자, 조상께 감사를 올리고 공동체가 하나 되어 어울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다. 분주한 귀성길과 상차림의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오늘날 우리 밥상 문화의 뿌리가 된 한가위의 본래 의미와 그 속에 담긴 따뜻한 풍속을 되새겨본다. 왜 우리는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이웃과 음식을 나누며 한 해의 가장 아름다운 밤을 기념했을까. |
한가위, ‘가을의 심장’을 의미하는 이름들
[Cook&Chef = 이경엽 기자] 추석은 한가위, 가위, 가배(嘉俳),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등 다채로운 이름으로 불려왔다. 순우리말인 ‘한가위’의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가위’는 ‘가운데’를 의미한다. 즉, 팔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으로, 계절의 정점에서 충만함과 풍요를 기념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 명절의 기원은 천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 시절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당시 서라벌의 부녀자들을 두 패로 나누고, 왕의 두 딸이 각 패를 이끌며 음력 7월 16일부터 한 달간 길쌈(베 짜기) 대결을 벌였다. 단순한 노동이 아닌, 공동체의 생산성을 겨루는 축제였다.
마침내 달이 가장 둥글어지는 8월 15일, 그간의 성과를 심사하여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성대한 술과 음식을 장만해 대접하며 노래와 춤,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라 칭했다. 노동의 결과물을 함께 나누고, 승패를 떠나 모두가 어우러져 잔치를 벌였던 이 ‘가배’의 풍속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추석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달이 가득 찬다(完)’는 시각적 이미지 또한 추석의 중요한 상징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온전히 밝히는 둥근 보름달은 풍요와 완성을 의미했고, 사람들은 이지러졌던 달이 다시 차오르듯 자신들의 소원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조상과 이웃을 잇는 ‘나눔’의 의례, 차례와 성묘
추석 아침의 시작은 차례(茶禮)와 성묘(省墓)다. 설날의 떡국 대신 햅쌀로 갓 지은 밥과 송편, 그리고 햇과일을 정성껏 차려 조상께 한 해의 수확을 알리고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의례의 핵심은 단순한 제사가 아닌, 조상과 후손, 그리고 살아있는 이웃과의 유기적인 연결과 나눔에 있다.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의미가 깃들어 있다. 김정숙 전남과학대학교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열두 달 세시풍속과 절기음식』에서 그 상징을 자세히 설명한다. 붉은 대추는 씨가 하나뿐이라 후손 중 왕이나 성현처럼 위대한 인물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 특성 때문에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는 과일로 빠지지 않았다. 통통하게 잘 마른 밤은 보통 한 송이에 세 톨이 들어있어 삼정승(三政丞)을 의미했으며, 자손이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
제수용 생선으로는 비린내가 적고 살이 단단한 조기처럼 이름이 ‘-기’로 끝나는 것을 으뜸으로 쳤다. 반면 꽁치, 갈치 등 ‘-치’로 끝나거나 고등어, 메기 등 등 푸른 생선이나 비늘 없는 어종은 부정을 탄다 하여 피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가문과 지역의 전통에 따라 차이가 있어 절대적인 규칙이라기보다는 조상을 향한 정성의 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차례가 끝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조상이 물려주신 복을 나눈다는 의미로 음복(飮福)을 한다. 이는 조상과 자손이 같은 음식을 나누며 정신적으로 이어진다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장만한 음식을 이웃과 넉넉히 나누어 먹는 것 또한 중요한 절차였다. 이는 수확의 기쁨을 우리 가족만이 아닌, 마을 공동체 전체의 것으로 여기던 ‘풍년의 인심’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성묘에 앞서 행하는 벌초(伐草)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례다. 여름내 무성하게 자란 조상의 묘소 주변 풀을 베고 깨끗이 정돈하는 일은 후손의 당연한 도리로 여겨졌다. 추석이 다가와도 벌초하지 않은 무덤은 자손이 없거나 불효한 집안의 징표로 여겨져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였다. 이처럼 추석은 조상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효(孝)의 정신을 실천하는 명절이기도 했다.
달빛 아래 펼쳐진 공동체의 축제와 풍류
먹을 것이 풍족하고 마음이 여유로운 한가위 저녁, 휘영청 밝은 달 아래에서는 다채로운 놀이와 풍속이 펼쳐지며 축제의 밤을 밝혔다.
강강술래는 풍요를 기원하는 달맞이와 노래, 춤이 결합된 여성 공동체의 대표적인 축제였다. 전남 해안 지방에서 유래한 이 원무(圓舞)는 처음에는 느린 진양조 가락으로 시작해 점차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빨라지며 참여하는 모든 이의 흥을 돋우었다. 단순한 원무 외에도 손을 잡고 줄지어 문을 통과하는 ‘남생아 놀아라’, 멍석을 말 듯이 둥글게 모이는 ‘덕석몰이’ 등 다양한 놀이가 결합되어 있었다.
김정숙 교수의 저서에는 “달빛이 배면 술보다 독한 것”이라는 표현과 함께, 달빛 아래 목청껏 노래하며 뛰놀던 소녀 시절의 애틋한 추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군사의 수가 많아 보이게 하는 위장 전술로 부녀자들에게 강강술래를 돌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단순한 놀이를 넘어 나라를 지키는 지혜의 상징으로도 자리 잡았다.
씨름은 단오와 함께 추석에 벌어지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였다. 마을의 넓은 마당이나 백사장에서 열린 씨름판의 최종 우승자는 ‘장사’라 불리며 황소나 쌀, 광목 등을 상품으로 받아 온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반보기는 시집간 딸에 대한 애틋한 정이 엿보이는 풍속이다. ‘출가외인’이라 하여 친정 나들이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며느리들은 추석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말미를 얻어 친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친정 식구와 시댁 식구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는데, 이를 ‘중로 회견(中路會見)’, 즉 반보기라 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음식을 싸 들고 와 짧은 만남을 가진 뒤, 아쉬움 속에 “회포를 반만 푸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니, 그 절절함이 오늘날에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올게심니는 한 해 농사에 대한 감사와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의례다. 잘 익은 벼나 수수, 조 이삭을 한 줌 베어다 기둥이나 대문에 걸어두는 풍속으로, 여기에 사용된 곡식은 다음 해의 종자로 쓰거나 떡을 만들어 조상께 먼저 올린 뒤 먹었다. 이는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인 씨앗을 소중히 여기던 농경민족의 지혜와 철학을 보여준다.
이처럼 추석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한 해의 결실을 자축하고 조상과 이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며, 공동체의 안녕과 미래의 풍요를 함께 기원했던 종합적인 문화 축제였다. 보름달 아래 소원을 빌기 전, 우리를 있게 한 이러한 전통의 의미를 먼저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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