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귀족의 뱃놀이로부터 15개 당고 피라미드의 비밀
[Cook&Chef = 이승우 기자] 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 일본, 과연 그곳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성묘’와 풍성한 ‘수확 감사’가 한데 얽힌 우리네 한가위와 달리, 흥미롭게도 일본은 이 두 가지 의미를 계절별로 완벽히 쪼개어 기념한다.
일본에서 민족 대이동과 성묘가 이루어지는 명절은 한여름인 8월의 ‘오봉(お盆)’이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의 가을밤이 되면, 오직 수확의 기쁨과 낭만에만 집중하는 ‘츠키미(月見, 달맞이)’를 즐긴다. 번거로운 차례상이나 꽉 막힌 귀성길의 스트레스 대신, 오롯이 달빛 아래서 미식을 즐기는 가을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헤이안 귀족의 뱃놀이에서 서민들의 가을 축제로
츠키미의 역사는 천 년 전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나라의 중추절 문화가 건너오면서, 당시 귀족들은 연못에 배를 띄우고 수면에 비친 달빛을 안주 삼아 시를 짓고 술을 기울였다. 이토록 우아하고 폐쇄적이었던 귀족들의 달놀이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 서민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달빛 아래 갓 수확한 토란이나 고구마를 바치며 한 해의 무사한 풍요를 감사하는, 가장 대중적이고 따뜻한 가을 축제로 진화한 것이다.

왜 하필 당고일까? 피라미드로 쌓아 올린 15개의 비밀
한국의 가을을 쫀득한 송편이 책임진다면, 일본의 츠키미를 상징하는 절대적인 미식은 단연 ‘츠키미 당고(月見団子, 달맞이 경단)’다. 초기에는 가을 제철 작물인 토란(사토이모)을 둥글게 깎아 바쳤지만, 점차 쌀농사가 국가의 중심이 되면서 쌀가루를 둥근 보름달 모양으로 빚어낸 당고가 그 자리를 꿰찼다. 하얗고 둥근 당고를 씹을 때 혀끝에 맴도는 쌀 특유의 은은한 단맛은 일본인들에게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리는 든든한 미각적 신호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왜 하필 이 당고를 ‘15개’나 준비하는 것일까. 이는 츠키미가 열리는 날짜, 즉 음력 8월 15일인 ‘쥬고야(十五夜)’에 맞춘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양력 달력으로는 매년 9월 중후반에 해당하기에, 일본 외식업계의 화려한 ‘츠키미 마케팅’ 역시 9월 초부터 일찌감치 시작돼 한 달 내내 가을밤을 달구는 것이다.
이 15개의 당고를 쟁반에 대충 펼쳐 놓는 것이 아니라, 맨 아래 9개, 그 위에 4개, 꼭대기에 2개를 얹어 정교한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점도 흥미롭다. 과거 일본인들은 이 삼각형의 꼭짓점이 하늘을 향하는 영적인 안테나 역할을 하여, 달의 신에게 감사의 마음과 풍년에 대한 기도를 닿게 해준다고 믿었다. 정성껏 쌓아 올린 제단 앞에서 기도를 마친 뒤, 달을 삼키듯 하얀 당고를 베어 무는 행위에는 자연의 에너지를 내 몸속으로 받아들인다는 깊은 주술적 의미까지 담겨 있다.

달맞이도 시대에 맞게, 츠키미 스위츠로 즐기는 현대의 가을
하지만 아무리 뜻깊고 낭만적인 전통이라도, 바쁜 현대인들에게 억새를 꺾어오고 15개의 둥근 당고를 빚어 정성스레 쌓아 올리는 일은 퍽 번거로운 미션이 되었다. 그래서 최근 일본의 젊은 세대와 대형 외식업계는 아주 영리하고 트렌디한 방식으로 이 가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 화과자점의 당고 대신,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쏟아내는 ‘츠키미 한정 메뉴’를 소비하며 계절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일본 맥도날드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영상을 보면, 굳이 번거롭게 제단을 차리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가볍게 달맞이를 즐기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영상 속 모델이 행복한 표정으로 베어 무는 ‘츠키미 스위츠(月見スイーツ)’ 시리즈는 전통 당고의 쫀득한 식감을 현대적인 디저트로 완벽하게 재해석해 냈다.
시기가 맞다면 일본 여행 중 훌쩍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에 들러 달콤한 츠키미 디저트 하나를 손에 쥐어보자. 부드러운 팥 앙금과 찰떡이 들어간 파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서늘한 밤공기 속 보름달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번거로운 15개의 당고 피라미드가 없어도, 1000년 전 귀족들의 뱃놀이 부럽지 않은 당신만의 가장 감각적인 츠키미가 그 자리에서 완성될 테니.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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