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게 취하지 말고 골라 마시는 재미를 보자.
[Cook&Chef = 신상열 칼럼니스트] 술. 술. 술. 먹다 지쳐서 이제는 이야기로 풀어본다.
술을 오래 마셨다고 술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 마시다 보면 취향만 고집스러워진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고, 이건 이런 날 먹어야 하고, 저건 저런 날 먹어야 한다.
나도 그렇다.
우선 와인.
와인은 재미가 있다. 마시는 재미보다 고르는 재미가 더 크다.
마트에도 있고, 백화점에도 있고, 요즘에는 편의점에도 제법 많은 와인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장소마다 들어오는 와인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돈이 있는 날에는 백화점에 가고, 없는 날에는 편의점에 간다. 마트는 잘 가지 않는다. 편의점은 싼 맛이라도 있는데, 마트 와인은 맛이 없다. 이유는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소비 동선이 마트의 와인 구매이다.
진열대 앞에 서면 익숙한 라벨과 처음 보는 라벨이 섞여 있다. 익숙한 와인을 고르면 실패하지 않는다. 문제는 새로울 게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와인을 고르면 기대가 생긴다. 문제는 맛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새로움이 주는 기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 대부분 그렇듯 와인 한 병 고르는 일도 결국 이 두 감정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와인을 고르다 보면 말이 많아진다.
“이건 지난번에 먹어봤는데 괜찮았고.”
“이건 처음 보는데 라벨이 좀 있어 보이고.”
“이 가격이면 실패했을 때 기분이 상당히 나쁠 것 같고.”
와인 한 병을 고르는데 경제학과 심리학과 디자인과 허영심이 총동원된다.
그런데 바로 그게 와인의 재미다.
와인은 포도 자체에 들어 있는 당을 효모가 알코올로 바꾸면서 만들어진다. 포도 품종과 토양, 기후, 발효 온도, 효모, 숙성 방식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진다. 포도 껍질의 탄닌과 색소, 오크 숙성에서 더해지는 향까지 생각하면 같은 ‘와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것이 과분하다.
그러니 진열대 앞에서 오래 고민하는 것도 아주 뜬금없는 행동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와인을 자주 골라서 마시다 보면 금방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와인을 고르면서 주절대고, 한 병을 비우는 몇 시간 동안 또 주절댄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의 취향을 들여다본다.
단 것을 좋아하는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지, 실패를 감수하는 사람인지, 늘 먹던 것만 고르는 사람인지. 그 정도까지 알아버렸다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젊은 분들은 참고하시라. 좋은 팁이다.
다음 막걸리.
막걸리도 와인과 비슷하다. 막걸리 역시 고르는 재미가 있다. 다만 훨씬 마음이 편하다. 가격표 앞에서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실패해도 인생에 큰 타격이 없다.
이것이 막걸리의 중요한 미덕이다.
요즘 편의점에 가면 막걸리 세계도 상당히 화려하다. 딸기, 망고, 레몬 같은 과일 막걸리부터 탁하고 묵직한 전통 생막걸리까지 한 줄에 늘어서 있다.
예전에는 막걸리라고 하면 다 비슷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쌀에는 포도처럼 효모가 바로 먹을 수 있는 당이 충분하지 않다. 대부분 전분이다. 그래서 누룩의 미생물과 효소가 먼저 전분을 당으로 바꾸고, 효모가 그 당을 다시 알코올로 만든다. 여기에 유산균과 여러 미생물이 개입한다.
그래서 어떤 막걸리는 달고, 어떤 막걸리는 시고, 어떤 막걸리는 탄산이 강하다. 막걸리 한 병 안에서도 미생물들은 꽤 열심히 일한다.
와인과 비교해 막걸리 가격은 말그대로 ‘혜자’다. 와인을 고르기가 부담스러운 날에는 막걸리를 꺼내 든다. 나는 둘 다 좋다.
그리고 소주(燒酎).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나는 이제 소주(희석식소주)를 먹지 말자고 말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다. 그런데 내 인생을 돌아보면 소주에는 늘 명분이 있었다. 화해하자고 소주 한잔. 기분 나쁘다고 소주 한잔. 욕하면서 소주 한잔. 한을 풀자고 소주 한잔. 그리고 술 먹고 다시 싸웠다. 다음 날 미안하다고 다시 만났다가 또 한잔했다. 한을 풀려고 마셨는데 한은 풀리지 않고 더 쌓였다.
가끔 생각한다. ‘소주 한잔’을 20대 때 조금만 덜 했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최소한 다음 날 오전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과학은 더욱 냉정하다.
우리 몸에 들어온 에탄올은 주로 간에서 아세트알데하이드로 바뀌고 다시 아세트산으로 대사된다. 이 과정에 따르는 탈수, 수면의 질 저하, 염증 반응 등이 다음 날의 두통과 피로, 메스꺼움 같은 숙취에 관여한다. 장기적인 음주는 더 유쾌하지 않다. 알코올 음료의 섭취는 여러 암의 위험 증가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 내가 소주를 백해무익하다고 말하는 것은 소주만의 화학적 특성 때문이라기보다, 높은 도수의 술을 빠르게 마셨던 나의 음주 방식과 그 결과까지 합친 개인적인 판결에 가깝다.
그래도 장점 하나는 인정한다. 싸다. 딱 여기까지다.
싸구려 소주보단 사케(청주)가 낫다.
사케의 맛은 쌀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막걸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
막걸리가 쌀의 모습을 어느 정도 남겨두는 술이라면 사케는 쌀을 깎고, 다듬고, 발효시키고, 걸러내면서 점점 맑은 방향으로 간다.
사케에서 재미있는 숫자가 정미보합(精米歩合)이다.
정미보합 70%라면 쌀알의 원래 무게 중 약 70%를 남겼다는 뜻이다. 50%라면 절반을 남긴 것이다. 그러니 숫자가 작을수록 더 많이 깎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확히 하자.
다이긴죠는 일반적으로 정미보합 50% 이하, 즉 쌀을 절반 이상 깎은 것을 기준으로 한다. 23%까지 깎아 만든 다이긴죠도 있지만 모든 다이긴죠가 23%인 것은 아니다.
쌀을 깎는 이유도 있다.
쌀의 바깥쪽에는 단백질과 지방 등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를 많이 제거하고 전분이 풍부한 중심부를 사용하면, 보다 섬세하고 깔끔한 향미를 설계하기가 유리해진다.
그리고 코지균이 만든 효소가 쌀의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동시에 효모가 그 당을 알코올로 만든다. 이른바 병행복발효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복잡한데 내가 마시면서 느끼는 것은 간단하다.
맑다. 부드럽다. 깨끗하다. 쌀로 만들었는데 쌀의 거친 느낌은 사라지고 쌀의 부드러움만 남아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온도가 바뀌면 표정도 달라진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차갑게.
사케는 계절을 제법 잘 아는 술이다.
맥주는 다르다.
맥주는 시원한 맛에 먹는다. 이 한마디면 사실 끝이다.
물론 맥주도 과학적으로 파고들면 상당히 복잡하다.
보리를 발아시켜 맥아를 만들고, 효소를 이용해 전분을 당으로 바꾸고, 홉을 넣어 쓴맛과 향을 만들고, 효모가 당을 먹으면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낸다.
맥아, 홉, 효모, 물.
단순한 재료들이 만나 라거도 되고 에일도 되고 스타우트도 된다.
하지만 더운 여름날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차갑게 식힌 맥주를 따면 ‘칙’ 소리가 난다.
한 모금 마신다.
탄산이 올라온다.
“캬.”
맥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시음평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맥주는 부담스럽지 않다. 대체로 와인보다 도수가 낮고, 차갑고, 탄산이 있다.
특히 여름에는 첫 모금만으로도 계절이 완성된다. 계곡에 발 담그고 마시는 맥주 한 캔에 굳이 테이스팅 노트가 필요한가. 시원하면 됐다.
결국 술도 기분 따라 먹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와인 진열대 앞에 서면 오래 들여다본다.
익숙한 라벨을 집었다가 내려놓고 처음 보는 것을 집는다. 가격을 보고 다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결국 처음 들었던 것을 산다.
부담스러운 날이면 막걸리를 집어 든다.
날이 추워지면 따뜻한 사케가 생각난다.
여름에는 맥주가 냉장고에 들어간다.
소주병은 부엌 찬장에서 치웠다.
생각해보니 굳이 술에 순위를 매길 필요도 없다.
소주 빼고는 기분대로 먹자.
좋은 사람과는 와인을.
돈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과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를.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사케를.
뜨거운 여름, 바다나 계곡에서는 차가운 맥주를.
와인은 포도를 발효시키고, 막걸리와 사케는 쌀을 발효시키고, 맥주는 보리를 발효시킨다.
미생물이 하는 일은 결국 비슷하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온도를 달리하고, 잔을 바꾸고, 계절을 붙이고, 추억까지 얹는다. 그러고 보면 참 별일이다.
그래서 술이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실 술도 많고, 인생도 아직 남아있다.
[저작권자ⓒ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경주의 '세상의 모든 사과'] (4) 파리스의 황금사과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https://cooknchefnews.com/news/data/2026/08/18/p1065580762357119_636_h.jpg)
![[류효일의 밥상뒤집기] (7) 맛있어 보이는 음식](https://cooknchefnews.com/news/data/2026/08/18/p1065583727031884_380_h.jpg)
![[신상열의 '음식잡설(雜說)'] (7) 술에 대한 담론](https://cooknchefnews.com/news/data/2026/08/18/p1065579406652680_445_h.jpg)
![[잇:티켓 EATIQUETTE] 이탈리아식 예절, 소스는 빵으로 커피는 식사 끝에](https://cooknchefnews.com/news/data/2026/08/17/p1065574258348400_295_h.jpg)
![[한식탐구] 칠월 칠석, 햇밀로 부친 밀전병](https://cooknchefnews.com/news/data/2026/08/17/p1065616807231785_483_h.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