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절임부터 깔라마리또스까지 신선한 해산물 타파스
[Cook&Chef = 조소현 기자] 안달루시아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자리한 말라가는 세계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고향이다. 정작 피카소는 14세에 바르셀로나로 갔지만, 피카소에 대한 말라가 사람들의 애정이 도시 곳곳에서 느껴졌다.
또 미완성 종탑 때문에 '외팔이 성당(La Manquita)'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말라가 대성당, 1세기 로마 극장과 그 위로 우뚝 선 알카사바 요새까지 수천 년의 역사가 한 도시에 겹겹이 쌓여 있다. 로마와 이슬람,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말라가는 그 자체로 거대한 야외 박물관 같다.
하지만 말라가를 가장 말라가답게 만드는 것은 바다다. 지중해와 맞닿은 항구도시인 이곳에서는 새벽에 잡아 올린 생선과 조개, 갑각류가 그날 바로 식탁에 오른다. 화려한 조리법보다 재료 본연의 신선함을 살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며, 숯불에 굽거나 살짝 익히고, 얇은 밀가루를 입혀 바삭하게 튀겨내는 단순한 조리법이 말라가 해산물의 진가를 드러낸다.
말라가의 구시가지 마드레 데 디오스 거리에 위치한 전통 해산물 타파스 식당 ‘라 페레그리나(La Peregrina)’는 관광객과 현지인이 어우러져 식당 안팎을 가득 메운다. 식당 벽과 접시에는 전통 타일 공예인 ‘아줄레호’로 해산물이 그려져 있어 바다를 연상시킨다. '신선한 재료를 가장 단순하게 조리한다'는 안달루시아 해안 식문화의 철학은 이런 '동네 마리스케리아(해산물 전문점)'에서 제대로 볼 수 있다.
자리를 잡고 먼저 '쎄로쎄로(Cero Cero)' 맥주를 주문했다. '쎄로쎄로'는 스페인어로 0.0을 뜻하며, 무알코올 맥주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스페인은 전 세계 무알코올 맥주 소비량의 약 14%를 차지할 만큼 무알코올 맥주가 일상화된 나라다.
특히 안달루시아는 스페인에서도 1인당 무알코올 맥주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타파스에 쎄로쎄로 맥주를 곁들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입맛을 돋우는 식전 메뉴로 '보케로네스 알 비나그레(Boquerones al vinagre)'를 주문했다. 신선한 멸치를 손질해 식초에 절여 만든 안달루시아의 대표적인 타파스로, 식초가 멸치 살을 하얗게 익혀 젤리처럼 부드러운 식감을 만들고 새콤함을 더해 비린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두르고 다진마늘과 파슬리로 향을 더한 멸치에 신선한 그린 올리브를 곁들여 먹으면, 은은한 바다 향과 산뜻한 풍미가 한층 살아난다. 생선회와 에스카베체(식초 절임)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깔끔한 맛으로, 우리나라에서 초장을 곁들인 생선회를 먹을 때처럼 입맛을 산뜻하게 깨워준다.
이어 작은 토기 그릇에 담겨 보글보글 끓는 상태로 나온 '감바스 알 필필(Gambas al pil-pil)'은 한국에서는 '감바스 알 아히요(마늘 새우)'로 더 익숙한 요리다. '감바스'는 스페인어로 새우를 뜻한다. '필필(Pil-pil)'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유래한 조리법으로, 원래는 생선에서 나온 젤라틴과 올리브오일을 유화시켜 소스를 만드는 방식이다. 안달루시아에서는 마늘과 고추를 넣은 뜨거운 올리브오일에 새우를 익혀 내는 요리에도 '필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를 빵 위에 올린 뒤 마늘 향이 배인 오일을 듬뿍 떠 얹어 한입 베어 물었다. 탱글한 새우의 단맛과 고소한 올리브오일, 은은한 매운맛이 어우러졌고, 남은 오일은 바게트에 듬뿍 올려 먹는 순간까지도 훌륭한 소스가 됐다.
'핀초스 데 아툰(Pinchos de atún)'은 큼직하게 썬 참치를 꼬치에 꿰어 구운 요리다. 말라가 인근의 카디스 해안은 최고급 참다랑어인 '아툰 로호(Atun Rojo, 붉은 참치)'의 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말라가 일대 해변 치링기토나 타파스 바에서는 큼직한 참치를 꽂아 숯불에 구운 핀초스 데 아툰을 흔히 볼 수 있다.
타다끼처럼 겉을 반 정도 익혀 은은한 불맛을 입히고 속은 붉은빛이 살아있는 촉촉한 회 같은 식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큼직한 레몬 조각이 같이 나오는데 새콤한 레몬즙이 참치의 진한 감칠맛을 돋보이게 한다.
말라가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깔라마리또스(Calamaritos)'다. '깔라마르(Calamar)'는 오징어를 뜻하고, '-또스(-tos)'는 작고 귀여운 것에 붙이는 접미사다. 성인 엄지손가락 만한 사이즈의 오징어로 주로 튀김으로 많이 먹는다. 마요네즈를 베이스로 한 알리올리 소스가 함께 나온다. 작고 신선해 껍질과 연골을 손질할 필요가 없이 연하다. 덕분에 내장의 고소함과 살의 야들야들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스페인 남부에는 ‘페스까이또 프리또(Pescaíto frito)’라는 독특한 식문화가 있다. 말 그대로 ‘작은 생선 튀김’이라는 뜻인데, 깔라마리또스는 이 문화의 핵심 중 하나다. 말라가가 맞댄 지중해 서부 연안인 알보란해에서 매일 쏟아지는 신선한 생선들을 단순하게 튀긴 것 만으로도 식문화가 된 것이다.
‘크로께따스 데 초코 엔 수 틴타(Croquetas de choco en su tinta)’도 별미다. 안달루시아에서는 갑오징어류를 ‘초코(Choco)’라고 부르는데, 이를 먹물(Tinta)과 함께 요리해 속을 채운 크로께따이다.
황금빛 튀김 아래로 비치는 오징어 먹물의 진한 검은색이 묵직한 감미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반으로 갈라 베어 물면 튀김옷이 콰작 부서지고 먹물을 머금은 베샤멜 소스가 퍼진다.
오징어 먹물이 비리거나 짤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먹물 파스타 소스를 응축한 듯한 고급스러운 풍미가 느껴진다. 속에 다져넣은 갑오징어 살이 주는 식감이 먹는 재미를 더하고 고소한 향이 입안을 감싼다.
캐주얼하고 소탈한 멋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바에 앉아 타파스 한 접시를 시켜놓고 수다떠는 사람들에게서 말라가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주문이 끊이지 않는 주방은 일사불란하게 튀기고 굽는 치지직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카운터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주방이 맛과 품질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피카소의 고향이라는 이름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한 접시의 타파스에 담긴 바다였다. 갓 올라온 해산물을 가장 단순하게 요리하는 방식, 그리고 그 음식을 둘러싸고 웃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말라가의 진짜 매력은 미술관이 아니라 식탁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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