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에게도 열려있는 현지인들의 맛집
[Cook&Chef = 조소현 전문기자] 스페인의 저녁은 유달리 늦게 시작된다. 밤 9시가 지나서야 식당들이 본격적으로 가득차기 시작하고, 자정까지도 저녁 장사에 한창이다. 이 늦은 시간에 가볍게 식사를 하고 오전 1-2시에나 잠에 드는 이들이 많다. 뜨거운 낮의 열기를 피해 생활의 시간을 늦춰 적응한 결과다.
마드리드의 관광지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트렌디하고 젊은 분위기의 말라사나 지구에 위치한 타파스 식당 '카사 마카레노(Casa Macareno)'. 낮에는 조용한 골목이지만 밤이 되면 골목 곳곳에 숨어있던 힙한 바와 식당들이 간판에 불을 켜고 이 곳의 활기가 시작된다.
스페인 음식 문화하면 떠오르는 '타파스(Tapas)'는 특정 요리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적은 양의 음식을 가볍게 즐기는 식문화를 뜻한다. 주로 와인이나 맥주 등과 잘 어울리는 한 접시의 음식들이다.
'카사 마카레노(Casa Macareno)'는 마드리드 전통 선술집과 가정식의 분위기를 되살린 타파스 식당으로, 점심부터 새벽 1시까지 운영된다. 관광객은 물론 현지 젊은 이들도 많이 찾는 곳으로 주중에도 미리 예약을 하는 수고 정도는 필요하다.
필자는 예약 없이 줄 서서 입장했는데 자리가 없어 벽에 붙은 아주 작은 바 테이블로 안내 받았다. 작은 가게가 많은 손님들을 받기 위해 빈 구석 없이 테이블로 꽉꽉 차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리를 잡고 받은 메뉴판. 읽기 어려운 스페인식 필기체가 빼곡했다. 다행히 직원의 안내로 메뉴판 뒷면의 QR코드를 통해 영어 메뉴를 볼 수 있었다.
메뉴판을 정독하고, 스페인의 대표 술 중 하나인 '베르무트'를 먼저 주문했다. '베르무트(vermut)'는 독일에서 유래해 이탈리아를 거쳐 스페인에 퍼진 허브를 기반으로 한 과실주다. 스페인에서는 단맛과 스파이시한 향을 더 한 것이 특징으로 보통 오렌지슬라이스, 올리브가 가니시로 함께 나온다.
점심 전에 이 베르무트를 마시는 시간을 이르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로 스페인 사람들은 베르무트를 사랑한다. ―'라 오라 델 베르무트(La hora del vermut, 베르무트 마시는 시간)'. 향쑥과 용담같은 약초가 들어가 한약 같은 향이 나지만 쓴 맛 보다 의외로 단맛이 돋보이는 술이다.
베르무트 한 잔은 다른 요리가 생각이 안날 정도로 완전하다. 달고 쓰다가, 짭짤한 올리브 한 입으로 자극을 더하고 오렌지로 상큼하게 마무리하면 괜찮은 디저트 한 접시 못지 않다.
베르무트 맛에 빠져있을 때, 주문한 요리들이 나왔다. 첫번째 메뉴의 풀네임은 'Pulpo a la gallega sobre cremoso de cachelos(갈리시아 식 문어와 감자퓨레)'이지만 '뽈뽀 콘 파타타스(감자를 곁들인 문어)'라고 하면 알아 듣는다.
삶은 문어 아래 으깬 감자를 깔고 파프리카 가루로 풍미를 더한 갈리시아식 요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어의 탱글함과 씹는 맛을 살려 조리하는 반면, 지중해권에서는 문어를 입에서 풀어지듯 아주 부드럽게 조리하는 고급 식재료로 여겨진다.
스페인에서 감자는 육류와 생선 모든 단백질에 빠지지 않고 곁들여지는 재료로, 감자 특유의 풍미가 진하고 포슬포슬한 식감으로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포만감과 만족감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감자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영혼의 탄수화물'인 셈이다.
한입 크기로 자른 문어와 으깬 감자를 스푼에 함께 올리고 굵은 지중해 소금 플레이크를 곁들여 먹으면, 적당한 짠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온 입안에 퍼진다. 올리브유에 훈연한 파프리카(Pimentón, 피멘톤) 가루를 섞어 만든 오일이 약간의 불맛과 단맛을 더해 부드럽고 순한 요리에 입체감을 더한다.
두번째 메뉴 '크로케타'. 메뉴판에는 'Croqueta de jamón ibérico con trufa'라고 쓰여있는데, 직역하면 '이베리코 하몽에 트러플을 곁들인 크로케타'이다. 잘게 다진 이베리코 하몽과 트러플을 베샤멜 소스(우유와 밀가루로 만든 걸쭉한 소스)에 섞어 속을 만들고 튀겨낸 요리로 이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이다.
우리가 아는 '크로켓', 일본식 발음으로 '고로케'라 불리는 이 음식은 프랑스가 원조다. 프랑스의 귀족 문화가 스페인으로 유입되며 들어온 요리로, 프랑스에서는 사이드나 전채 요리 정도였지만 스페인에서 하몽, 초리조 등 갖가지 현지 식재료를 다져 넣어 변형되며 타파스 문화의 핵심 메뉴로 발전했다. '크로케타'는 다양한 재료들로 변주를 주어 타파스 식당들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기 좋은 메뉴이다.
이 곳의 '크로케타'는 얇은 튀김옷의 바삭함을 느끼려는 찰나, 부서지며 나오는 하몽과 트러플이 어우러진 향이 천천히 입안에 퍼진다. 갓 튀긴 따끈한 튀김이 맛없을 리 없지만, 이건 튀김의 즉각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밀도 있게 자리 잡힌 재료들이 내는 깊이였다. 크림같이 부드러운 베샤멜 소스에 고기의 결과 짭짤함을 더하는 하몽이 중심을 잡고, 거기에 트러플이 과시하지 않으며 은은한 풍미를 더한다.
식사를 하는 내내 가게 안은 좀처럼 쉴 틈이 없었다. 접시를 들고 좁은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직원들, 스페인어 수다와 즐거운 웃음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 이 식당의 진짜 매력은 마드리드 사람들이 밤을 보내는 방식을 가장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식사를 마치고 밤 9시 반쯤 가게를 나섰지만 입구에는 여전히 웨이팅 중인 사람들이 있었다. 말라사나의 어두운 골목에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하루가 정리될 시간, 마드리드의 밤은 이제 막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듯했다.
스페인 여행의 시작에서 어떤 식당을 가야 할지 고민된다면, ‘카사 마카레노’는 꽤 좋은 출발점이 된다. 화려하거나 과장되 않은 타파스 문화, 베르무트 한 잔, 그리고 마드리드 사람들이 밤을 즐기는 방식까지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해주는 곳이다. 한 도시의 생기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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