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 효율화 내세운 ‘장류 식품공전 개정안’
[Cook&Chef = 이경엽 기자] 식품의약품안전처(처장 오유경)와 산하 식품안전정보원(원장 이재용)이 연구 중인 ‘장류 식품공전 개정안’이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기존 5개로 나뉘어 있던 간장 유형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 둘째, 식품 분류체계의 최상위 단계인 대분류에서 ‘장류’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 ‘조미식품류’ 하위 항목으로 옮기는 방안이다.
지난 8월 13일 서울 용산구 비즈센터에서 열린 ‘식품공전 분류 체계와 기준규격 개선을 위한 산업계 자문단 회의’에서 식품안전정보원이 이 같은 초안을 내놓으면서 논란은 본격화됐다.
행정적 효율화를 위한 단순 정비라는 명분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아무도 그런 요구를 한 적 없다”는 반발이 터져 나오며 파장이 커지고 있다.
업계의 단호한 선 긋기
논란의 출발점으로 지목된 한국장류협동조합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협동조합 이명주 이사는 쿡앤셰프와의 통화에서 “5가지로 지나치게 세분화된 간장 유형을 2~3개로 줄이자는 의견은 낸 적이 있다”면서도, “지금처럼 5종을 모두 하나로 묶자는 주장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대분류에서 ‘장류’ 항목을 삭제하는 것 역시 반대한다고 밝혔다.
즉, 업계가 요청한 것은 유형 축소였을 뿐, 단일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행정은 업계 요구보다 더 나아간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불필요한 갈등을 키웠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개 단일화? 정부가 먼저 제시한 안”
박재영 간장협회 간사는 쿡앤셰프와의 인터뷰에서 “업계에서는 간장의 5개 유형에 대해 ‘1개 단일화’를 주장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협회도 지난 8월 정보원에서 주최한 행사에서야 이런 내용을 처음 알게 됐다”며 “결국 ‘1개 단일화’라는 안은 정부 쪽에서 먼저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의 요구가 아닌, 행정 독자적 발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치권·시민사회도 “NO”
반발은 업계에만 그치지 않았다.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과 토론회에는 어기구 국회 농해수위원장, 이개호 전 농식품부 장관 등 5명의 국회의원이 공동 주최자로 참여했다.
또한 간장협회,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한국장류발효인협회,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서울인아이쿱생협, 한살림 등 15개 단체들이 ‘장류 식품공전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려 공동 대응에 나섰다.
대책위는 성명서를 통해 “발효 없는 산분해 간장은 간장이 아니다”, “제조 방식이 전혀 다른 제품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는 것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직격했다. 업계뿐 아니라 정치권과 시민사회까지 반대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이어 대책위는 ▲우리의 장이 ‘전통’이나 ‘한식’이 아닌 고유한 ‘장’으로 분류돼야 하며, ▲대분류에서 장류가 독립적으로 유지되고, ▲산분해간장은 장류에서 분리되며, ▲간장·된장·메주의 통합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재영 간사는 “10일 열린 토론회에서도 식약처는 정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12월까지 연구 용역을 진행한 뒤 의견을 조율하겠다고만 답했다”며 “효율성을 내세우는 행정 논리가 소비자 권리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소비자 선택권 박탈, 전통의 위기
이번 논란의 본질은 소비자 선택권 침해다. 발효와 화학적 분해라는 근본적 차이를 무시하고 간장을 하나로 통합할 경우, 소비자는 자신이 구매하는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권대영 전 한국식품연구원장은 토론회 발표문에서 “산분해 간장을 ‘간장’으로 표기한다면 발효 간장과의 구분이 사라져 소비자의 알 권리는 무의미해진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히 품질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의 ‘장 담그기’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 식문화의 정수다. 그런데 이를 ‘조미식품류’ 하위 소스로 격하시키는 것은 전통문화의 가치와 역사성까지 흔드는 일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정부의 논리: 효율성과 국제 정합성
식약처는 “효율성”과 “국제 정합성”을 강조한다. 문귀임 식약처 식품기준과장은 토론회 발표문에서 “식품공전은 전통문화 보존이 아닌, 안전관리와 위해요소 관리를 위한 행정 기준”이라며 “현재 장류 분류는 지나치게 세분화·중복되어 있어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식품안전정보원 김원용 정책연구실장은 한발 물러섰다. 그는 쿡앤셰프와의 통화에서 “간장 5종을 1개로 단일화하는 방안은 확정된 안이 아니라 연구 과제 속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일 뿐”이라며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된 초안”이라고 해명했다.
다만 그는 “식품공전 유형이 290여 개로 너무 방대해 간소화는 필요하다”며 “간장뿐 아니라 떡류, 음료류 등도 정비 대상이며, 향후 공청회 등을 통해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효율 앞세운 폭주”… 현장은 불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협동조합, 협회, 대책위는 모두 “효율성이 소비자 권리를 앞설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하지만, 한 번 던져진 안이 행정 절차 속에서 기정사실화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가 효율을 앞세워 국민 신뢰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류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장류는 맛과 건강, 전통과 문화의 뿌리다. 이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식문화 전반을 위협하는 행정 폭주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결론: ‘아이디어’가 남긴 불신
식품안전정보원이 “아이디어 차원”이라며 한발 물러섰지만, 이미 업계와 시민사회에 남긴 불신은 깊다. 협회도, 협동조합도, 국회도, 시민사회도 원치 않은 안을 정부가 먼저 제시했다는 사실은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소비자가 자신이 먹는 간장이 오랜 시간 발효된 전통 장인지, 단 몇 시간 만에 화학적으로 만든 산분해 간장인지 알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곧 선택권과 알 권리의 박탈이다.
효율은 행정의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국민의 식탁 앞에서 효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 전통, 그리고 소비자의 권리다. 이번 논란은 행정이 어디까지 현장을 존중해야 하며,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다시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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