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소비는 상품을 사는 것, 현재의 소비는 경험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
[Cook&Chef = 허우주 기자] 서울에서 '가장 힙한 동네'를 물을 때 그 답은 몇 년마다 달라진다. 1980~1990년대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젊음과 소비의 상징이었다. 이후 청담동이 고급 소비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2000년대 들어서는 홍대가 인디 문화와 젊은 창작자들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대에는 가로수길과 경리단길, 연남동, 서촌, 북촌이 차례로 주목받았고, 최근에는 성수동과 한남동 등 리테일 상권이 서울을 대표한다.
새로운 상권이 등장하는 것은 어느 도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서울은 조금 다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힙한 동네'로 꼽히던 곳이 어느새 평범한 상권이 되고, 또 다른 상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왜 서울의 유행은 늘 다른 동네로 향하는 것일까.
세계 수도의 상권은 쌓이고, 서울의 상권은 이동한다
도쿄의 긴자는 오랜 기간 일본을 대표하는 상업지구라는 지위를 유지해 왔다. 오모테산도와 시부야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도쿄의 중심 소비 공간으로 기능한다. 파리의 샹젤리제와 생제르맹데프레, 마레 지구는 관광과 쇼핑,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다. 런던 역시 소호와 코벤트가든, 옥스퍼드 스트리트가 도시의 대표 상권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해외 도시에도 새로운 상권은 등장한다. 그러나 기존 상권을 대체하기보다 새로운 문화지구가 추가되는 방식에 가깝다. 전통 상권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며 새로운 공간과 공존한다. 반면 서울은 다르다. 서울의 대표 상권은 고정된 좌표 위에 존재하지 않고 소비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다. 서울의 상권 변화는 소비문화의 변화 과정에 가깝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서울의 대표 상권은 '목적지형 상권'이었다. 명동은 쇼핑을 위해 찾는 곳이었고, 압구정은 최신 유행을 소비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신촌과 강남역도 외식과 쇼핑, 오락을 즐기기 위해 방문하는 대표적인 상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특정 브랜드를 방문하거나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상권을 찾았다. 소비의 중심은 상품과 서비스였다. 상권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브랜드와 점포를 유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어디에 가느냐보다 무엇을 사느냐가 중요했던 시대였다.
골목을 소비하기 시작한 사람들
서울 상권의 흐름이 달라진 건 2010년대 들어서다. 가로수길과 경리단길, 망리단길, 송리단길 등 길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들은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이 아닌 작은 카페와 식당, 편집숍, 공방이 모여 성장한 길이다. 사람들은 특정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이곳을 찾지 않았다. 대신 거리를 걷다가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SNS의 확산은 소비 형태 변화와 맞물렸다. 사람들은 자신만 아는 공간을 공유했고, 골목의 분위기와 감성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 시기 서울의 유행은 골목을 따라 이동했다. 하나의 카페가 유명해지면 주변으로 식당과 상점이 들어섰고, 상권은 길을 따라 선형으로 확장됐다. '-단길'이라는 이름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많은 사람이 몰리기 전의 '새로운 동네'를 발견하는 것이 하나의 놀이 문화가 되면서, 유행은 끊임없이 다음 지역을 향해 이동했다.
자영업 중심 구조가 만든 빠른 순환
서울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짧은 기간에 급속한 성장을 경험한 도시다. 유럽 도시들이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역사와 문화 위에서 상권을 발전시켰다면, 서울은 산업화를 거치며 도시의 모습이 빠르게 변화했다. 재개발과 재건축, 도시재생 사업이 반복되면서 상권 역시 변화와 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구조가 형성됐다. 특정 지역이 오랜 시간 상권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보다 새로운 지역이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서울의 상권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또 다른 이유는 높은 자영업 비중에 있다. 새로운 상권은 대개 작은 카페나 식당, 편집숍, 공방 등 개인 사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창업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젊은 창업자들이 모이고, 독특한 공간과 콘텐츠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상권이 성장하면 임대료도 함께 상승한다. 초기 분위기를 만든 소규모 사업자들이 떠나고 프랜차이즈와 대형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지역의 개성이 희석된다. 이후 소비자들은 다시 새로운 동네를 찾아 이동한다.
흔히 이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설명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은 결과에 가깝다. 서울의 상권 이동을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원인은 계속해서 새로운 공간을 찾는 소비문화와 빠른 창업·폐업이 반복되는 산업 구조에 있다.
성수동 상권의 혼잡도를 나타낸 데이터. 역을 중심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 상권이 형성돼 있다. 사진 = 서울 실시간 도시데이터
동네를 향유하고 경험을 확장하는 시대
최근 주목받는 성수동과 연남동, 한남동은 과거의 골목상권과도 성격이 다르다. 성수동을 찾는 사람들은 유명 카페 한 곳만 방문하지 않는다. 공장을 개조한 문화 공간을 둘러보고, 브랜드 쇼룸을 방문하며, 팝업스토어를 체험한다. 거리 곳곳에 흩어진 공간들을 연결해 하나의 경험으로 소비한다. 특정 골목보다 동네 전체의 분위기와 문화가 중요한 소비 요소가 됐다.
서울의 상권은 이제 길에서 동네로 확장되고 있다. 과거 사람들이 상품을 소비했다면, 이후에는 골목의 감성을 소비했고, 지금은 지역이 가진 문화와 이야기를 소비하는 단계에 이른 셈이다.
성수동이 주목받는 이유는 예쁜 카페 때문만이 아니다. 공업지역이라는 역사와 오래된 공장 건물, 창작자와 브랜드가 결합하며 만들어 낸 독특한 서사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서울의 다음 상권은 어디로 향할까
서울 상권의 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변화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는 예쁜 공간과 독특한 인테리어만으로도 새로운 상권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들은 공간 이상의 가치를 찾는다.
지역만의 역사와 문화, 창작 생태계, 그리고 그 공간이 가진 이야기가 중요해지고 있다. 성수동 이후의 다음 상권 역시 단순히 '예쁜 동네'가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과 서사를 가진 지역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 상권의 역사는 소비의 대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상품을 사기 위해 명동과 압구정을 찾았고, 골목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가로수길과 경리단길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성수동과 연남동에서 동네 전체의 문화를 경험한다.
서울의 상권은 여전히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서울 사람들이 무엇을 소비하고 어떤 경험을 원하는지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는 변화야말로 서울이라는 도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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