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나물 '어수리'에선 한양에 남은 정순왕후의 향
[Cook&Chef = 조소현 기자] 1457년 음력 6월, 창덕궁에서 쫓겨난 열일곱 살 이홍위.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 단종이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자 노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나룻배로만 닿을 수 있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 산골짜기로 유배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 역사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간다. 단종의 폐위부터 죽음까지, 영월에서 보낸 시간은 어땠을까.
쌀밥 한 그릇을 꿈꾼 산골 마을
영화 속 청령포는 쌀밥도, 고기도, 전도 구경하기 어려운 외진 산골 마을이다. 촌장 엄흥도는 옆 마을 노루골에 고관대작이 유배 온 뒤 주민들이 덩달아 잘 먹고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유배객의 복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쌀이며 고기며 귀한 식재료를 갖다 바치고, 그 몫이 마을에도 돌아간다는 것이다.
어린 막동이의 생일에도 먹일 것이 변변치 않은 청령포 사람들에게 유배객은 고깃국과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마을은 그렇게 유배지를 자처한다. 고관대작 나리 한 명만 잘 모시면 오랜만에 배를 채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기대에 부푼 청령포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은 수염도 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이홍위. 역적으로 몰려 왕위에서 쫓겨난 노산군이었다. 잘 먹고 잘살게 해줄 고관대작은커녕 역적을 모시는 마을이 됐으니, 청령포 사람들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임금의 밥상, 유배의 밥상
조선에서 임금의 식사는 ‘수라’라 불렸다. 전국 각지에서 제철에 난 좋은 식재료가 궁궐로 모였고, 수라간을 거쳐 임금 앞에 올랐다. 오늘날 왕의 수라상을 떠올리면 산해진미가 가득한 화려한 상차림부터 생각하기 쉽지만, 임금의 식사는 단순히 귀한 음식을 많이 먹는 일이 아니었다.
그 바탕에는 음식으로 몸을 다스리는 식치(食治)의 개념이 있었다. 병이 난 뒤 약으로 치료하기에 앞서 평소 먹는 음식으로 몸을 살피는 것이다. 왕의 건강은 곧 나라의 안위와 직결되기 때문에 수라상에 무엇을 올리고 임금이 얼마나 먹었는지를 살피는 일은 왕실의 중요한 일이었다.
이홍위가 계속 왕이었다면 평생 그런 밥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위에서 쫓겨난 그의 밥상도 신분과 함께 궁궐 밖으로 밀려났다.
영월은 한양과 지형부터 달랐다. 청령포는 삼면을 서강의 물줄기가 감싸고 나머지 한쪽은 험한 산이 막고 있다. 지금이야 빼어난 절경으로 꼽히지만, 과거에는 나룻배 없이는 드나들기 어려운 육지 속 섬이었다.
논농사가 쉽지 않은 산간 지역에서 흰 쌀밥은 매 끼니 당연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쌀이 부족하면 메밀 같은 곡물로 끼니를 채웠고, 산에서 나는 나물도 밥상에 올랐다. 영화에서도 청령포 백성들의 밥상은 보리밥과 나물 하나가 전부다.
오늘날 강원도의 별미로 알려진 곤드레밥도 이런 환경에서 탄생했다.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물을 쌀에 섞어 밥을 지었다. 지금은 일부러 찾아 먹는 향토음식이 됐지만, 한때는 귀한 쌀을 아끼고 부족한 끼니를 채우기 위한 산골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전국의 좋은 식재료가 모이는 임금의 수라상과 쌀밥조차 귀한 산골의 밥상. 이보다 먼 두 밥상이 있을까.
왕과 백성, 밥상을 나누는 식구가 되다
영화 속 노산군은 청령포에 도착한 뒤 좀처럼 밥을 먹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차린 밥상도 밀어낸다. 왕위를 빼앗기고 역적으로 몰려 유배된 나약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노산군을 먹이기 위해 청령포 사람들이 움직인다. 엄흥도가 잡은 다슬기로 국을 끓이고, 막동이가 통발로 잡은 민물고기로 전을 부친다. 마을 어르신이 캐온 산나물, 용이가 잡은 토끼로 만든 저민고기, 막동애비가 캔 산삼, 이천댁이 따온 산딸기도 상에 오른다. 막동 어멈은 마을 사람들이 구해 온 재료를 모아 한 상을 차린다.
제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저마다 산에서 캐고 강에서 잡은 것으로 차린 밥상. 왕에 대한 섬김을 넘어, 좌절의 시간에 놓인 한 인간을 향한 연민이었다. 그 마음에 노산군은 다시 수저를 든다.
이후 영화는 음식을 주고받는 관계를 뒤집는다. 노산군을 따르던 백성들이 유배지를 찾아와 강물에 음식을 띄워 보냈는데, 고기전과 굴비, 육포, 삼, 동태전 등 청령포 사람들은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음식들이다. 노산군은 자신에게 온 이 귀한 음식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내어준다.
처음에는 청령포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어 노산군을 먹였다. 이제는 노산군이 자신에게 온 음식을 다시 마을 사람들과 나누고, 엄흥도의 아들 태산에게 글을 가르치고, 태산은 다시 마을 아이들에게 배운 글을 전한다. 청령포에는 아이들이 글월을 읊는 소리가 퍼진다.
그렇게 왕과 백성은 음식을 통해 연대하는 '식구'가 된다.
임금에게 바치는 나물, 어수리
어수리는 영월을 비롯한 강원 산간에서 자라는 미나리과의 나물이다. 어린잎과 줄기를 먹는데, 다른 산나물과 구별되는 특유의 진하고 쌉싸름한 향을 지녔고 식감이 좋다. 주로 봄에 어린잎을 나물로 데쳐먹고, 생잎을 쌈채소로 먹는다. 뿌리는 '왕삼'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오늘날에도 어수리는 혈액 순환을 원활이 해줘 심혈관계 질환과 중풍에 효과가 있어, 건강식픔으로도 인기다. 원래 이름은 ‘어누리’였으나 청령포 백성들이 단종에게 대접한 것을 계기로 ‘임금에게 드리는 나물’이라는 의미의 ‘어수리’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영화 속 노산군의 밥상에 어수리가 오른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영화 밖에도 단종과 어수리를 잇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유배지에서 어수리를 먹은 단종이 그 향에서 정순왕후의 분내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입맛조차 잃은 단종에게 어수리는 한양에 두고 온 아내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었다.
정순왕후와 ‘여인시장’, 인간적인 연대
영화 밖에는 또 다른 음식 이야기가 전해진다. 열네 살에 단종의 왕비가 된 정순왕후는 남편이 폐위되면서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뒤 두 사람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했다.
궁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기 어려울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를 딱하게 여긴 여인들이 나물이라도 먹이려 했지만 삼엄한 경비 탓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여인들은 기지를 발휘해 정순왕후의 거처 근처에 남자가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채소 시장인 ‘여인시장’을 열었다. 이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척하며 정순왕후에게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건넨 것이다. 이 일대는 청계천 영도교 인근에 여성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으로 남았다고 전해진다.
역사적 사실과 구전의 경계는 따져볼 필요가 있지만,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야기에는 비운의 왕과 왕비를 인간적인 연대로 지켜낸 이름 없는 사람들의 따뜻함이 남아 있다.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위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유배된 해 10월, 그의 삼촌인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또 다른 복위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발각됐고 어린 노산군의 운명도 끝을 향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사약을 받았다거나 교살됐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졌다. 영화는 단종의 죽음에 관한 다양한 기록과 전승 위에 상상을 더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에 모두가 두려워 물러났을 때, 나선 인물이 영월의 호장 엄흥도였다는 기록이 <중종실록>에 남아있다. 엄홍도의 이름이 공식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영화가 엄흥도와 단종의 생전 관계를 상상해 그리는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이 실제로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엄흥도와 청령포 사람들의 존재는 외롭고 쓸쓸했던 단종의 최후에 작은 위로라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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