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오요리 기자] 2013년 12월 5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김장, 한국에서의 김치 만들기와 나누기'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것은 김치라는 음식 자체가 아니었다.
자연 식재료를 활용해 겨울 음식을 준비하는 지혜, 세대를 잇는 조리법, 그리고 노동의 고단함을 나누고 정을 쌓는 '나눔과 연대'의 공동체 정신이 핵심이었다. 김장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한국인의 정체성과 공동체 문화를 응축한 자산임을 국제사회가 공인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등재 이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김장문화의 현실은 위태롭다. 1~2인 가구의 급증, 아파트 중심의 주거 환경,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포장김치 시장의 성장은 전통적인 김장 풍경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의 '2022년 김장문화 관련 소비자 인식조사'는 이 위기를 수치로 보여준다. 김장을 직접 담그는 가구 비율은 54.3%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매년 한다'는 응답은 줄고 '가끔 한다'는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다. 김장은 필수 가사노동에서 일부의 선택적 연례행사로 전락할 기로에 섰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경기도의회가 정책적 실험을 시작했다. 김미리 경기도의원(개혁신당, 남양주2)이 대표 발의한 '경기도 김장문화 활성화 및 지원 조례'가 그것이다. 이 조례는 최근 '제22회 한국지방자치학회 우수조례 시상식'에서 개인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며 정책적 가치를 입증했다.
사라지는 무형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지방정부가 전국 최초로 구체적인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김장문화를 식탁 위 음식 차원에서 공동체 회복을 위한 '정책의 장'으로 끌어올린 첫 시도이며, 공동체 붕괴라는 난제에 대한 해법을 전통 식문화에서 찾으려는 혁신적 접근이다.
사라지는 '품앗이', 위기의 김장문화와 그 사회경제적 비용
김장문화의 정수는 '나눔'과 '연대'를 실천하는 '김장 품앗이'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장을 '겨우내 먹을 김치를 한꺼번에 많이 담그는 일'로 정의하면서도, 그 과정의 공동체적 성격을 핵심으로 꼽는다.
이웃이 함께 모여 수백 포기의 배추를 다루는 고된 노동은 단순한 노동력 교환을 넘어서는 행위였다. 갓 담근 김치와 수육을 나누며 마을 대소사를 공유하고 서로의 고충을 위로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김장은 한국 사회 미시 단위에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축적하고 유대감을 강화하는 중요한 기제였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이 기반을 흔들었다. 통계청 '2023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1인 가구 비율은 34.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2인 가구를 합치면 전체의 60%를 넘어선다. 아파트 거주 비율 역시 50%를 상회한다.
대가족이 김장을 하던 넓은 마당은 사라졌고, 층간 소음과 좁은 주방, 음식물 쓰레기 처리 등 아파트 환경의 제약 속에서 대규모 김장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이는 포장김치 시장의 폭발적 성장으로 직결됐다.
세계김치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B2C 포장김치 시장 규모는 2021년 기준 약 3,000억 원을 돌파했으며, B2B 시장까지 포함하면 7,000억 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시간'과 '노동'에 대한 기회비용 개념이 식문화에 깊이 자리 잡았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변화가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은 상당하다. 첫째, 세대 간 지식과 문화 전수의 단절이다. 가정마다 다르던 김치 레시피는 표준화된 공장 제품으로 대체되며 식문화의 획일화가 가속된다. 둘째, 이웃 간 교류 단절로 공동체 의식이 약화하고 사회적 고립이 심화된다.
셋째, 지역 농산물 소비 패턴의 변화다. 과거 김장철은 지역 농수산물의 대규모 소비 시기였으나, 포장김치 업체들이 대규모 계약재배나 수입 농산물을 사용하면서 지역 중소 농가의 판로가 위축되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한다. 김장문화의 위기는 식탁의 변화를 넘어 공동체 붕괴와 지역 경제 위축으로 이어지는 복합적 문제다.
전국 최초의 입법, 조례에 담긴 구체적 정책 해법과 그 함의
경기도의 '김장문화 활성화 및 지원 조례'는 이러한 다층적 위기 인식에서 출발했다. 김미리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16명의 의원이 동참한 이 조례는 '문화 보존'이라는 선언적 당위성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 수단을 법제화했다는 점에서 기존 문화 진흥 조례와 다르다.
한국지방자치학회가 이 조례의 창의성, 합법성, 정책 효과성, 지역사회 파급력을 높이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례의 핵심 내용은 세 가지 정책 수단으로 구체화된다.
첫째, '김장문화 체험 및 교육 프로그램 운영'이다. 도민,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다문화가정 등을 대상으로 김장 과정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사업이다. 이는 단순한 요리 교실을 넘어, 문화적 단절을 막고 김장의 가치를 체득하게 하는 교육의 장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둘째, '지역 공동체 김장 사업에 대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이다. 이 조항은 조례의 핵심이다. 아파트 부녀회, 마을 공동체, 사회복지단체 등이 주관하는 공동 김장 행사에 장소, 재료, 경비 등을 지원할 명확한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관 주도의 하향식 방식에서 벗어나 민간의 자발적 활동을 촉진하는 상향식(Bottom-up)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사라진 '김장 품앗이'를 현대적 형태로 부활시키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 촉매제 역할을 기대한다.
셋째, '전통 식문화 보존을 위한 조사·연구 및 홍보 사업'이다. 김장의 역사, 지역별 특색, 건강 기능성 등을 체계적으로 알리고 관련 기록을 수집·보존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이는 김장문화를 단기적 이벤트가 아닌,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장기적 비전을 보여준다.
심사위원회는 이 조례가 김장문화를 '보존 대상'에서 '공동체 회복을 위한 능동적 정책 수단'으로 위상을 격상시켰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전통문화를 박제된 유산이 아닌, 현대 사회의 병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살아있는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발상의 전환이다. 실질적인 '지원 근거' 법제화로 정책 실행력을 담보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식문화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외식업계와 소비자에게 던지는 메시지
이번 경기도의 조례 제정은 지방정부 식문화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과거 정책이 산업 육성, 위생 관리 등 경제적 측면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식문화의 사회적, 공동체적 가치를 정책의 중심에 두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김미리 의원은 수상 소감에서 "김장문화는 세대와 이웃을 잇는 중요한 공동체 문화"라며 "조례가 전통의 가치를 오늘의 정책으로 연결하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김장 행위를 통해 사회적 고립감을 완화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세대 간 소통을 촉진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외식업계, 식품 산업, 소비자에게 새로운 기회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지역 농산물 생산자와의 상생 모델 구축이다. 조례에 근거한 공동체 김장 사업이 활성화되면 경기도 내 농어민이 직접적인 수혜자가 될 것이다. 지역 중소 농가들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하고 '로컬푸드 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 신뢰를 구축하고 지속가능한 지역 먹거리 순환 체계(Local Food System)를 강화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둘째, 외식업계의 새로운 가치 창출 기회다. 김장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 소비자들은 '공장김치'와 '직접 담근 김치'의 차이를 민감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국내산 재료로 직접 담근 김치'는 식당의 강력한 마케팅 포인트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잊혔던 지역 토속 김치를 발굴해 메뉴에 적용하거나, '김장 체험'과 식사를 결합한 '팜 투 테이블(Farm-to-table)' 형태의 새로운 외식 상품 개발도 가능하다. 이는 저가 수입 김치와의 차별화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음식에 문화적 스토리를 입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회가 된다.
셋째, 소비자의 인식 전환과 식품 산업의 고도화다. 김장 체험은 소비자에게 김치 한 포기에 담긴 정성과 노동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이는 김치 가격 인식을 '단순 비용'에서 '가치에 대한 지불'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소비자 인식 변화는 저가 경쟁에 매몰된 포장김치 시장에도 긍정적 자극을 줄 수 있다. 더 좋은 원재료, 건강한 제조 방식, 다양한 프리미엄 김치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관련 산업의 품질 향상과 고도화를 이끌 잠재력을 지닌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제언, 정책 실험의 성공 조건을 묻다
조례 제정만으로 사라지는 문화가 즉시 부활하기는 어렵다. 경기도의 정책 실험이 성공적인 모델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 확보다. 문화 정책은 단기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 안정적인 예산 확보와 중장기 계획이 없다면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표류할 위험이 크다. 관련 예산을 농업 진흥 기금 등과 연계해 안정적 재원을 마련하고, 사업을 지속할 전담 조직이나 민관 협력 거버넌스 구축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관 주도의 하향식 사업 추진을 경계해야 한다. 김장문화의 본질은 자발적 참여와 수평적 연대다. 공무원 실적을 위한 동원식 행사로 전락하는 순간 조례의 취지는 퇴색된다. 정책 설계부터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민간이 사업의 주체가 되도록 지원하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로서의 행정 역할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성공 여부를 판단할 다층적 지표 개발이 시급하다. 참여 인원이나 김치 생산량 같은 단순 수치를 넘어 정책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정책 참여 후 이웃 교류 횟수 변화', '공동체 소속감 지수', '지역 농산물 구매 비중 변화' 등 사회적 자본 증진 효과를 측정할 수 있는 정성·정량적 평가 모델이 필요하다.
경기도의 이번 조례는 전통 식문화가 현대 사회의 단절과 고립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다. 이 입법적 시도가 성공 모델로 자리 잡아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얼어붙은 이웃 간의 마음을 녹이는 축제로서의 김장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Cook&Chef / 오요리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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