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최수근 관장의 조리 인생은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는 한 문장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의 출발점에는 호텔 총지배인의 꿈이 있었다. 호텔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요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 그리고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말이 낯설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의 시선이 있었다.
그는 경희 호텔경영전문대 조리과 1회로 입학했고, 이후 하얏트 호텔과 신라호텔을 거쳐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의 결심만으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다. 어린 두 딸을 두고 프랑스로 떠난 남편의 뒤에는, 그 선택을 함께 감당한 사모님의 시간이 있었다.
Q. 관장님께서 조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요리사를 꿈꾸셨던 건가요?
A. 처음부터 “나는 요리사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저는 호텔 총지배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YMCA 요리학교, 호텔학교 같은 곳을 다녔는데, 그때 강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총지배인이 되려면 요리를 알아야 한다.” 그 말이 제게 크게 남았어요.
그래서 요리를 시작한 거예요. 총지배인이 되려면 호텔을 알아야 하고, 호텔을 알려면 요리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외국 호텔학교를 보니까 그게 맞더라고요. 로잔스쿨에 가보니까 1학년은 요리, 2학년은 서비스, 3학년은 마케팅, 4학년은 인터뷰를 가르치더라고요. 그걸 보고 “아, 맞다” 싶었어요.
우리나라는 보통 교양을 먼저 하고 전공을 나중에 하잖아요. 그런데 외국은 기본부터 다르게 가르치더라고요. 저는 지금도 총지배인의 꿈을 이야기해요. 요리를 시작한 출발점도 그 꿈이었어요.
Q. 당시에는 남성이 조리를 배운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A. 그때는 지금하고 많이 달랐어요. 우리나라에 조리과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던 때였어요. 경희 호텔경영전문대 조리과가 만들어졌고, 저는 그 조리과 1회로 입학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들어가 보니까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는 거예요. “남자가 어떻게 요리를 하러 들어왔냐”는 말을 들었어요. 지금처럼 셰프라는 직업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아니었어요.
저는 그때 요리사로서는 학력이 높은 편이었어요. 그래서 칭찬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힘든 것도 많았어요. 스스로 말하자면 왕따 중의 왕따였어요. 그 현실을 이기려면 길을 찾아야 했어요. 저는 그 길이 유학이라고 생각했어요.
Q. 사모님과는 학교에서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시절 분위기 속에서 결혼 후에도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A. 집사람하고는 캠퍼스 커플이에요. 제가 학생회장이었고, 집사람은 여학생회장이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도 집사람이 “우리 남편이 요리사다”라는 말을 쉽게 못 했어요. 그때는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시대였어요. 밖에서는 “특수 업무를 한다”고 말했어요.
1978년, 1979년, 1980년대 초반은 그 정도 분위기였어요. 남자가 조리를 한다는 것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더 이 길을 제대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국내에서만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고, 유학을 준비하게 됐어요.
Q. 유학은 처음부터 프랑스를 생각하셨던 건가요?
A. 처음에는 스위스 요리학교를 준비했어요. 1978년쯤이었어요. 친구와 누님이 그곳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어서 기술학교를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학교가 선착순 입학이었고, 제 순서가 3년 뒤에 온다고 하더라고요. 3년은 너무 길었어요. 그래서 프랑스로 바꾼 거예요.
프랑스로 바꾸고 나서는 자료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대사관에 문의했어요. 그런데 대사관에서 대사 부인이 르 꼬르동 블루를 알고 있었어요. 그분이 그 학교의 한 과정을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관심 있으면 알아보라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래서 자료를 받아 번역하고 준비하게 됐죠.
Q. 르 꼬르동 블루라는 학교를 선택하신 데에는 어떤 기대가 있으셨나요?
A. 저는 그때 100년 된 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궁금했어요. 가보니까 전통이 있는 학교였어요. 학교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 학교는 에펠탑 근처에 있었고, 당시에는 조그만 강의실 두 개 정도로 운영되고 있었어요. 그래도 전통이 있는 학교였고, 커가는 학교였어요. 저는 엘리자베스 브라사르가 이끌던 시기의 르 꼬르동 블루에서 공부했어요. 그런 경험이 제게는 컸어요.
Q.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가 콘소메 수프였다고 하셨습니다.
A. 맞아요. 콘소메 수프 때문이었어요. 콘소메 수프를 만드는 방식이 미국식, 프랑스식, 일본식이 다 달랐어요. 그런데 신라호텔에 갔더니 일본식으로 가르치더라고요. 저는 그걸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라호텔 중역진에게 편지를 썼어요. 내가 왜 프랑스에 가려고 하는지, 콘소메 수프 때문에 간다고 처음에는 회사에서 등록금과 체재비를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유학을 결정하고 나서 회사에 사정으로 인해 결국 자비로 가게 됐어요. 그때 제 나이가 32살이었고, 딸이 세 살, 한 살이었어요. 그래도 저는 떠났어요. 이미 3년 정도 준비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어요.
Q.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사모님의 결단도 컸던 것 같습니다.
A. 집사람이 보내준 거예요. 집사람이 힐튼호텔 룸메이드로 취업했어요. 저 때문에요. “내가 할 테니까 당신 갔다 와라” 그렇게 해준 거예요.
그때 등록금이 굉장히 비쌌어요. 3개월에 250만 원 정도였어요. 당시에는 800만 원이면 집을 살 수 있는 정도였다고 기억해요. 집을 살까, 유학을 갈까 고민했어요. 결국 유학을 선택한 거죠.
저는 프랑스에서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일을 했어요. 매일같이 일하면서 공부했어요. 서울에서는 집사람이 일을 하며 생활을 감당했어요. 그래서 유학을 할 수 있었어요.
Q. 사모님께서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는지에 대한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A. 쉽지 않았죠. 집사람은 원래 결혼할 때 경희대학교에서 조교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룸메이드 일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아이도 어렸고요.
집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매일 울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당신을 너무 어렵게 하면서까지 유학을 가려는 의미는 없다. 너무 힘들면 그만둬라. 다만 지금 그만두면 당신 마음에도 남을 수 있으니, 기쁜 마음이 됐을 때 그만둬라.”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나중에는 호텔에서 다른 업무를 맡게 되면서 생활이 조금 해결됐어요. 그래도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유학을 갈 수 있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못 갔어요.
Q. 유학 시절 작성하신 레시피 노트에도 사모님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도식화된 레시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모님의 도움이 있었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A. 맞아요. 그 노트는 제가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작성한 것이에요. 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적은 내용도 있고, 집에 돌아와 다시 정리한 내용도 있어요. 당시에는 글로만 레시피를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조리 과정과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도식화해서 정리하려고 했어요. 요리를 단순히 순서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 노트를 다시 보니까 제 글씨만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부분에는 집사람 글씨도 남아 있어요. 제가 강의를 듣고 와서 정리한 내용 중에 집사람이 함께 정리해준 부분이 있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일을 하면서 공부하던 시기였어요. 몸도 마음도 쉽지 않았는데, 집사람이 그런 기록을 정리하는 데도 함께해준 거죠.
그래서 그 노트는 단순한 레시피 자료만은 아니에요. 제가 프랑스에서 배운 서양 조리와 소스 체계를 정리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사람의 내조가 함께 남아 있는 자료예요. 제가 가족들에게도 그런 말을 했어요. “엄마는 나의 인생입니다. 평생을 2인자로, 내조자로 나를 보필했어요. 내가 못난 남편이지요.” 우리 시절에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집사람이 공헌을 많이 했죠.
Q. 프랑스에 남을 수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A. 프랑스에서 남으라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남았으면 식당 하나를 했을 수도 있죠. 그래서 집사람에게 편지를 썼어요. “여기서 남으라고 하는데 남을까, 말까” 하고요.
그랬더니 집사람이 오라고 했어요. “거기서 푸대접 받느니 우리나라 가서 큰소리치고 삽시다.” 그게 집사람의 조언이었어요.중간에 집사람을 프랑스로 불러서 같이 여행도 했어요. 보름 동안 유럽 다섯 나라를 돌았어요. 많은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서울 가서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돌아온 거예요.
최수근 관장의 조리 인생은 호텔 총지배인의 꿈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꿈은 조리를 거치며 다른 방향으로 깊어졌다.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말이 낯설던 시대, 그는 조리과 1회 학생이 되었고, 호텔 주방을 거쳐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
그 선택의 뒤에는 사모님의 결단과 시간이 있었다. 관장은 그 시간을 “나의 인생”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의 유학은 한 개인의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부부가 함께 감당한 삶의 선택이었다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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