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ok&Chef = 이승우 기자] 한국인에게 ‘게이샤(芸者)’라는 단어는 2006년 국내에 개봉한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통해 제법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혹은 스페셜티 커피를 즐겨 마시는 혹자에게는 ‘신의 커피’라 불리는 최고급 원두 품종의 이름으로 먼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우리에게 묘한 신비감과 화려함으로 각인된 게이샤. 오늘은 그 화려한 장막 뒤에 숨겨진 그녀들의 독특한 미식(美食) 세계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화려하게 수놓인 기모노,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장신구, 그리고 얼굴을 새하얗게 덮은 화장(오시로이)과 붉게 칠한 앵두 같은 입술. 일본 전통 미(美)의 상징으로 불리는 교토 기온(祇園) 거리의 게이샤(마이코)들은 그 이면에 극한의 직업적 고충을 안고 살아간다.
숨조차 크게 쉬기 힘든 복장과 완벽하게 세팅된 화장을 유지한 채, 그녀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먹을까? 게이샤의 밥상은 철저히 그녀들의 ‘직업적 제약’에 맞춰 진화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조심스러운 미식의 세계다.

붉은 입술을 지켜라, ‘테마리 스시(手まり寿司)’의 탄생
게이샤 식문화의 제1원칙은 ‘오초보구치(おちょぼ口)’, 즉 ‘입을 작게 벌려야 한다’는 것이다. 입을 크게 벌리면 공들여 칠한 붉은 입술 연지가 번지거나 새하얀 얼굴 화장에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초밥(니기리스시)은 한입에 넣기엔 다소 크고, 베어 물자니 밥알이 흩어지거나 간장이 기모노에 흐를 위험이 크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테마리 스시(공 모양의 초밥)’다. 일본의 전통 장난감 공인 '테마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반 초밥의 절반 이하 크기로 작고 동글동글하게 빚어낸다. 젓가락으로 가볍게 집어 입술에 닿지 않게 쏙 넣을 수 있고, 간장이 이미 발라져 나오거나 소금으로 간이 되어 있어 값비싼 기모노를 버릴 염려도 완벽히 차단한 ‘게이샤 맞춤형’ 요리다.

‘마이코 사이즈’로 진화한 샌드위치와 덮밥
게이샤라고 해서 매일 전통 일식만 먹는 것은 아니다. 젊은 마이코(수습 게이샤)들은 빵이나 양식도 즐겨 찾는다. 하지만 기온 거리에 위치한 카페나 빵집, 식당들에는 이른바 ‘마이코 사이즈’라는 독특한 불문율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게이샤들이 즐겨 먹는 ‘가츠산도(돈가스 샌드위치)’나 ‘다마고산도(계란 샌드위치)’를 주문하면, 주방에서는 빵의 테두리를 모두 잘라내고 일반적인 크기의 4분의 1 혹은 6분의 1 크기로 아주 잘게 썰어 이쑤시개와 함께 내어준다. 튀김덮밥(텐동)을 시켜도 새우튀김을 통째로 올리지 않고, 처음부터 3~4등분으로 잘라 밥 위에 올려준다.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한입에 쏙쏙 털어 넣을 수 있게 배려한 교토 화류계(하나마치) 식당들만의 섬세한 서비스다.

절대 금기 식재료와 ‘시다시(배달)’ 문화
손님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술을 따라야 하는 직업 특성상, 철저히 금기시되는 음식들도 있다. 마늘, 파, 부추 등 입 냄새를 유발하는 식재료는 물론이고, 국물이 사방으로 튈 수 있는 뜨거운 우동이나 라멘 같은 면 요리도 근무 중에는 절대 피해야 할 기피 대상 1호다.
이처럼 외식에 제약이 많다 보니, 교토의 기온 거리에는 게이샤들이 머무는 숙소(오키야)로 완성된 요리를 배달해 주는 ‘시다시(仕出し, 고급 배달도시락)’ 문화가 일본 그 어느 곳보다 고도로 발달해 있다. 최고급 요정의 셰프들이 냄새가 나지 않고, 옷에 튈 염려가 없으며, 식어도 맛있는 한입 크기의 반찬들을 정교하게 채워 넣은 시다시 도시락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에 가깝다.

현대 일본에 스며든 ‘한입의 미학’을 맛보다
오늘날 게이샤들이 탄생시킨 이 섬세한 ‘한입 미식(히토쿠치 미식)’은 화류계의 굳게 닫힌 담장을 넘어 일본 현대 식문화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백화점 지하 식품관(데파치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석함 같은 프리미엄 도시락이나, 매년 3월 3일 여자아이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축제인 '히나마쓰리'에 일반 가정집에서 즐겨 만들어 먹는 화려한 테마리 스시가 그 대표적인 흔적이다. 먹는 사람의 옷차림과 상황까지 배려하는 일본 특유의 '오모테나시(환대)' 문화의 정수가 이 작은 요리들에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교토 기온 거리를 걷다 보면 요즘은 일반 관광객들도 마이코 사이즈로 썰어낸 샌드위치나 다채로운 테마리 스시를 파는 식당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훗날 교토를 방문하게 된다면,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그녀들의 치열한 직업정신을 떠올리며 입술에 닿을세라 조심스럽게 맛보는 ‘한입의 예술’을 직접 경험해 보길 권한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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