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티켓 EATIQUETTE] 조지아의 한 끼는 왜 길어질까

정수연 기자

cnc02@hnf.or.kr | 2026-09-21 15:00:42

와인과 건배, 음식과 이야기가 이어지는 전통 연회 ‘수프라’
타마다가 이끄는 식탁에서 만나는 조지아의 환대 문화
출처 : AI 생성이미지

[Cook&Chef = 정수연 기자] 조지아의 한 가정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식사에 초대받았다고 해보자. 식탁에는 빵과 치즈, 채소와 호두를 버무린 요리, 치즈를 넣어 구운 빵인 하차푸리와 고기 요리가 이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 사이로 와인잔이 놓이고, 새로운 음식도 계속 더해진다. 어느 순간 한 사람이 잔을 든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이고, 그는 가족과 평화, 오늘 찾아온 손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짧은 한마디로 끝나는 건배와는 풍경이 꽤 다르다.

이런 전통 연회를 조지아에서는 ‘수프라(supra)’라고 부른다. 그리고 잔을 들고 이야기를 이끄는 사람은 ‘타마다(tamada)’다. 처음 접하면 수프라도, 타마다도 낯선 말이다. 나라 자체도 마찬가지다.

조지아는 러시아 바로 아래, 튀르키예의 북동쪽에 있는 나라다. 서쪽은 흑해와 맞닿아 있고, 남쪽에는 아르메니아, 동쪽에는 아제르바이잔이 있다. 지도로 보면 러시아와 튀르키예 사이에서 흑해 동쪽에 붙어 있다. 유럽과 아시아가 맞닿는 경계에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국토는 한국의 약 70% 정도다. 흑해 쪽 서부는 비가 많고 온화하며, 동부에는 포도 재배가 활발한 지역이 펼쳐진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높은 산들이 이어진다. 이런 환경의 차이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음식문화로 이어졌다.

식탁에서 연회로, ‘수프라’의 의미

수프라는 결혼이나 생일, 손님을 맞는 날부터 새해와 종교 축일, 포도 수확을 마친 날까지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고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차려진다. 고인을 기억하는 자리에도 별도의 수프라가 열린다. 수프라는 축하와 수확의 결실, 추모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을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나누는 식사 형식으로 자리해왔다. 행사와 지역이 달라지면 음식과 건배의 내용도 함께 달라진다.

‘수프라’라는 단어의 출발점도 흥미롭다. 이 말은 원래 식탁보나 식탁을 뜻했고, 페르시아어 ‘소프레(sofre)’와 연결된다. 중세 조지아 문헌에서도 처음에는 식탁을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이후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연회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의미가 넓어졌다. 식탁보를 부르던 말이 그 위의 음식과 와인,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모두 품게 된 것이다.

조지아에는 오래전부터 와인과 연회 문화가 이어져왔다. 오늘날처럼 타마다가 주제를 정하고 여러 차례 건배를 이끄는 형식은 그 오랜 바탕 위에서 후대에 차츰 다듬어졌다.

지역과 계절이 채우는 수프라의 음식

처음 수프라에 앉으면 음식의 양부터 눈에 들어온다. 빵과 치즈, 절인 채소, 허브와 호두를 이용한 음식, 구운 고기와 생선, 버섯, 하차푸리 같은 여러 접시가 한 상에 오르고 식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요리가 더해지기도 한다.

17세기 서부 조지아에서 생활한 이탈리아 선교사 아르칸젤로 람베르티는 귀한 손님이나 특별한 날이면 먹을 양을 훨씬 웃도는 음식과 술을 차리던 모습을 기록했다. 손님과 중요한 날을 풍성한 상차림으로 맞았던 모습이 오래된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앞서 본 지역별 환경의 차이는 식탁에도 나타난다. 서부에서는 17세기 이후 옥수수가 중요한 작물로 자리 잡으면서 옥수수빵 ‘므차디(mchadi)’를 치즈와 함께 먹는 문화가 발달했고, 채소와 호두, 허브를 이용한 음식도 널리 먹는다.

동부 카헤티는 조지아를 대표하는 포도 산지다.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가 오랫동안 지역 생활과 이어져왔다. 높은 산악지역에서는 양과 소를 키우는 목축이 발달하면서 치즈와 육류도 주요 식재료가 됐다.

수프라의 메뉴는 지역과 행사에 따라 달라진다. 결혼 수프라만 보아도 카헤티에서는 삶은 고기 요리 하슐라마와 치즈가 중요하게 등장하고, 산악지역 스바네티에서는 고기를 넣어 구운 쿠브다리, 므티울레티에서는 고기와 육즙을 넣어 빚은 만두 힌칼리가 오른다. 전통적으로 가을에 많이 열렸던 결혼식에는 옥수수와 호박, 포도즙을 이용한 디저트와 여러 과일까지 수확철의 먹거리가 풍성하게 더해졌다.

한 상을 들여다보면 어느 지역에서, 어떤 계절에, 무슨 일을 기념하고 있는지도 함께 읽힌다. 그 많은 음식 사이에서 수프라의 흐름을 잡아주는 것은 와인과 건배다.

와인과 수프라

조지아에서 와인은 수프라의 건배를 움직이는 중요한 매개다. 그 배경에는 매우 오래된 포도주 문화가 있다. 조지아의 신석기 유적에서는 기원전 약 6000~5800년까지 올라가는 포도주의 흔적이 확인됐다. 오늘날 조지아가 ‘8000년 와인 역사’를 이야기하는 근거도 여기에서 나온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통 양조법 가운데 하나가 ‘크베브리(qvevri)’다. 포도즙과 껍질 등을 달걀 모양의 큰 토기에 담아 땅속에서 발효·숙성시키는 방식이다.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 제조법이 전해져왔고, 이 전통은 2013년 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랐다.

가을 포도 수확인 ‘르트벨리(rtveli)’도 와인과 수프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보여준다.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포도를 따고 그날 포도를 압착한 뒤 수프라를 차린다. 동부에서는 갓 구운 빵이, 서부에서는 따뜻한 하차푸리가 먼저 오르는 사례도 있다. 한 해 동안 길러낸 포도가 와인이 되고, 함께한 노동의 마지막이 다시 사람들이 모이는 식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와인잔을 들어 식탁의 방향을 잡는 사람이 타마다다.

건배를 이끄는 사람, 타마다

타마다는 그날 수프라에서 건배와 대화의 흐름을 맡도록 선택된 사람을 가리킨다. 말솜씨와 유머, 사람들의 분위기를 읽는 감각과 절제를 갖춘 사람이 주로 맡는다. 누구에게 말을 건넬지, 한 주제를 얼마나 이어갈지, 언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지도 타마다가 살핀다.

그는 건배의 주제를 만들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결하면서 수프라 전체의 분위기와 속도를 이끈다. 수프라에는 음식의 순서와 함께 ‘말의 순서’가 있는 셈이다.

가족과 평화를 잇는 건배

타마다가 잔을 들면 평화와 가족, 부모와 조상, 아이와 미래, 사랑과 우정, 나라와 오늘의 손님 같은 주제가 건배에 오른다. 하나의 주제를 꺼내 그 의미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은 연설처럼 이어진다.

첫 건배의 주제도 지역마다 달라질 수 있다. 서부 구리아에서는 평화를, 카르틀리에서는 신을, 동부 카헤티에서는 성상과 성지를 향한 축원으로 시작하는 사례가 전해진다. 그날의 장소와 사람, 행사의 의미가 건배의 내용에 담긴다.

이런 건배를 듣다 보면 조지아 사람들이 한 식탁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이야기해왔는지도 보인다. 부모와 조상을 기억하고, 현재의 손님을 축복하고, 아이와 미래의 행복을 기원한다. 와인 한 잔을 사이에 두고 과거와 현재, 다음 세대가 차례로 불려 나온다.

이야기는 다른 참석자에게도 이어진다.

건배를 이어받는 ‘알라베르디’

타마다는 때때로 특정 참석자에게 ‘알라베르디(alaverdi)’를 건넨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건배의 주제를 이어 말할 차례를 넘겨주는 것이다.

가족을 위한 건배라면 자신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우정이나 손님에 관한 건배라면 함께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보탤 수 있다. 외국에서 온 손님도 이 차례를 받을 수 있다. 현재의 주제에 맞춰 자신이 느낀 감사나 함께한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전하면 된다.

처음 초대받은 손님에게 중요한 것도 바로 이 흐름을 읽는 일이다.

손님이 기억할 수프라의 예절

타마다나 다른 참석자가 건배를 하고 있을 때에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타마다가 제시한 주제에 맞춰 잔을 들고, 알라베르디를 받으면 현재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말을 보탠다.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위한 건배가 나오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가우마르조스(gaumarjos)’는 이런 자리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조지아어 건배 표현이다. 누군가를 위해 잔을 들었을 때 함께 화답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다.

수프라는 몇 시간 동안 이어지기도 한다. 중요한 건배에서는 잔을 끝까지 비우는 관습도 있으며, 실제 자리에서는 건배의 성격과 분위기에 따라 마시는 양이 달라진다. 와인은 사람들의 말을 이어주고, 건배는 누구를 위해 어떤 이야기를 건네는지에 무게를 둔다.

손님을 맞는 수프라의 방식

주인의 행동을 보면 처음 보았던 풍성한 상차림의 의미도 한층 또렷해진다. 음식과 와인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찾아온 손님을 건배의 주제로 올리며, 그 사람이 대화 속에 참여할 자리를 만들어준다.

건배 사이에는 노래와 이야기가 들어가고 큰 축하 자리에서는 춤이 이어지기도 한다. 먹고, 말하고, 노래하고, 다시 잔을 드는 시간이 겹치면서 수프라는 한 끼를 넘어 사람들이 오랫동안 함께하는 시간이 된다.

음식과 말로 완성되는 수프라

처음 조지아의 수프라에 앉았을 때에는 식탁을 덮은 수많은 접시와 긴 건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의미를 하나씩 알고 나면 같은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풍성한 음식에는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와 지역의 계절이 담기고, 와인 한 잔에는 이 땅에서 오래 이어진 포도 문화가 겹친다. 타마다가 꺼내는 가족과 평화, 조상과 미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한 식탁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함께 나누는지를 보여준다.

수프라의 예절은 잔을 언제 들고 어떤 말을 건넬지 아는 데서 시작해, 한 식탁이 사람들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이해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식탁보를 뜻하던 ‘수프라’가 연회 전체의 이름으로 넓어졌듯, 그 자리에서 나누는 것도 음식에서 사람과 시간으로 넓어진다.

함께 먹고, 이야기를 건네고, 중요한 사람과 순간을 기억하는 것. 조지아의 수프라는 그렇게 한 끼를 관계의 시간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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