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진의 '화가들의 식탁'] (1) 피카소와 가자미

박유진 칼럼니스트

cnc02@hnf.or.kr | 2026-10-21 16:01:31

생선뼈를 흰 점토에 눌러 만든 도기 작품
접시에 남은 것조차 영원하게 만드는 작업
피카소의 도자 작품.  파블로 피카소, 《Bullfight and Fish (verso: Faces)》, 1957. 먹고 남은 생선의 골격을 점토에 눌러 그 흔적을 작품의 일부로 남겼다.  Museu Picasso, Barcelona. Photo: Gasull Fotografia. 사진 = Succession Pablo Picasso, VEGAP.

[Cook&Chef = 박유진 칼럼니스트] 예술가의 작업실은 어디에서부터일까. 

올해 초 스페인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솔(sole, 가자미와 같은 가자미목에 속하는 납작한 생선) 요리를 먹었다. 정체도 제대로 모른 채 주문했지만 정말 맛있어서 여행 중 그 식당을 한 번 더 찾아갔다. 몇 달 뒤 이 글을 쓰기 위해 피카소의 식탁을 조사하던 중 다시 솔이라는 생선을 만나게 되었다.

피카소의 식탁은 그의 명성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 남아 있는 식료품점, 치즈 가게, 정육점의 주문과 거래 기록을 보면 그의 장바구니에는 감자, 상추, 시금치, 토마토, 당근과 같은 채소와 과일, 치즈, 올리브, 버터, 생선 등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 평범한 재료다. 하루 네 개의 달걀과 우유를 한 달 단위로 주문한 메모가 남아 있고, 바게트와 식빵 역시 매일 배달됐다.

이 평범한 식재료들은 식탁에만 머물지 않았다. 생선과 조개류, 소시지와 과일은 그의 정물화에 반복해서 등장했다. 피카소는 부엌 식탁에서 글을 쓰곤 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은 음식과 부엌을 그의 삶과 창작을 연결하는 중요한 단서로 보고, 2018년 《Picasso's Kitchen》('피카소의 부엌'이라는 뜻으로 음식과 요리가 피카소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 전시)에서180점이 넘는 작품과 자료를 한데 모았다.

특히 전쟁기의 정물화에서는 음식의 존재가 더욱 두드러진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 머물던 피카소의 회화 작품에는 냄비와 과일 접시, 생선과 조개류, 소시지 등이 등장한다. 실제 생활에서는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였지만, 그의 정물 속 식탁은 가득 차 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은 이를 결핍의 시대와 맞서는 일종의 '풍요'로 해석한다.

생선뼈를 들고 있는 피카소  Photo by David Douglas Duncan, 1957. Courtesy of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사진 = Harry Ransom Center,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음식과 작품의 거리는 피카소가 도자 작업에 몰두하면서 더 가까워졌다. 피카소는1946년 프랑스 남부 발로리스의 마두라 도예공방을 접한 뒤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도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1947년부터 1953년까지 도자 작업에 집중했고, 이후에도 작업을 이어갔다. 접시 위에는 정어리와 솔, 달걀 프라이와 소시지가 등장했다. 요리와 도자는 의외로 닮은 점이 있다. 재료를 섞고, 손으로 형태를 만들고, 마지막에는 불을 거쳐 이전과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 피카소 미술관 역시 그의 도자 작업을 설명하며 이 두 행위의 유사성을 짚는다.

그리고 1957년 4월, 식탁과 작업 사이의 경계가 거의 사라지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 칸의 저택 라 칼리포르니에 살고 있었다. 이 시기 피카소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한 사람은 미국의 사진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David Douglas Duncan)이었다. 덩컨은1956년 피카소를 처음 만난 뒤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그의 일상과 작업 과정을 지속적으로 촬영했다.

어느 날 피카소의 식탁에는 솔 뫼니에르(sole meunière)라는 요리가 올랐다. 솔에 밀가루를 얇게 묻혀 버터에 구운 뒤 레몬 등을 곁들이는 프랑스식 생선 요리다. 덩컨의 기록에 따르면 피카소는 생선살을 거의 수술하듯 정교하게 발라냈다고 한다. 덩컨은 식사를 마친 피카소가 생선뼈를 들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피카소는 생선뼈를 식탁에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가, 잠시 뒤 손에 젖은 점토 한 덩어리를 들고 돌아왔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덩컨은 이 장면을 기록했다. 덩컨의 회고에 따르면 피카소는 식사를 마치고 남은 생선뼈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려는 구상이었단다.

피카소는 그 골격을 흰 점토에 눌러 형태를 찍었다. 그렇게 생선의 실제 뼈가 남긴 자국은 같은 해 제작된 《Bullfight and Fish (verso: Faces)》(불파이트 앤드 피시, '투우와 물고기'라는 뜻으로 뒷면에는 얼굴들이 표현된 도자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작품은 붉은 도기 위에 실제 생선 골격으로 눌러 찍은 흰 점토를 덧붙여 만든 것으로, 지름42cm의 접시 형태다. 현재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카소에게 식사는 단순한 한끼가 아니라, 일상이 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식사 중에도 예술가를 가만두지 않는 생선은 식탁 매너를 배울 필요가 있다.

어쩌면 예술가에게 작업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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