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이 일본] 백년 발효의 맛, 하치조지마 ‘쿠사야’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10-17 15:00:44
[Cook&Chef = 이승우 기자]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아열대 화산섬 하치조지마(八丈島). 일본 최남단의 이국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이 섬에는 전 세계 미식가들의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자극하는 명물 요리가 있다.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홍어회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냄새나는 음식 중 하나로 꼽히는 일본의 극한 발효 생선, ‘쿠사야(くさや)’다.
'냄새가 난다(쿠사이)'는 뜻의 형용사에서 유래한 이름답게, 쿠사야를 불에 굽기 시작하면 반경 수십 미터 밖에서도 꼬릿한 암모니아와 짙은 블루치즈 향이 진동한다. 하지만 이 끔찍한 악취의 장벽을 넘어서면, 일반 건어물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눅진하고 폭발적인 감칠맛(우마미)이 미각을 사로잡는다.
소금이 금보다 귀하던 시절, 생존이 빚어낸 발효 과학
쿠사야의 탄생 배경에는 에도 시대 섬마을 주민들의 가혹한 생존 투쟁이 숨어 있다. 당시 하치조지마를 비롯한 이즈 제도(伊豆諸島)에서 생산되는 귀한 소금은 모두 막부에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섬사람들은 갓 잡은 날치나 고등어를 오래 보존하고 싶었지만, 매번 새로운 소금을 쓸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이들은 생선을 절였던 소금물을 버리지 않고 수십 번씩 재사용하는 고육지책을 택했다. 생선의 피와 내장 진액이 소금물에 끊임없이 축적되었고, 섬 특유의 덥고 습한 기후가 더해지며 이 물은 거대한 미생물 배양액으로 변모했다. 부패가 아닌 ‘발효’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가문의 보물 ‘쿠사야 액’, 아미노산과 유산균의 결정체
이 짙은 갈색의 발효액을 ‘쿠사야 액(くさや液)’이라 부른다. 쿠사야 액은 씨간장이나 종자균처럼 100년, 길게는 200년 넘게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가문과 공방의 핵심 자산이다.
현대 과학으로 분석한 결과, 쿠사야 액은 단순한 썩은 물이 아니라 유산균과 다양한 젖산균이 살아 숨 쉬는 항균의 성단(星團)으로 밝혀졌다. 이 액에 생선을 10시간 이상 담갔다 말리면, 유해균의 번식은 억제되고 단백질이 펩타이드와 아미노산으로 철저히 분해되어 감칠맛이 극대화된다. 과거 섬사람들에게 쿠사야는 단순한 반찬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 비타민과 영양을 보충해 주던 천연 자양강장제였다.
현대의 쿠사야, 와인과 치즈를 만나 힙한 미식으로 진화하다
전통적으로 쿠사야는 숯불에 구워 독한 고구마 소주를 곁들이는 향토 음식이지만, 최근 일본 식음료 업계와 현지 공방들은 이 진입장벽 높은 식재료를 젊은 세대에게 쥐여주기 위해 영리한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패키징'과 '페어링'의 서구화다. 실내에서 생선 굽는 냄새를 꺼리는 1인 가구 청년층을 위해, 공방에서 미리 구운 뒤 냄새를 완벽히 가두어 올리브오일에 재운 '병조림(빙즈메) 쿠사야'가 출시돼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레시피의 변신도 흥미롭다. 젊은 미식가들과 다이닝 업계는 쿠사야의 꼬릿한 발효 향이 서양의 치즈나 앤초비와 결을 같이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잘게 찢은 쿠사야를 크림치즈와 섞어 크래커에 올리거나, 마요네즈에 버무려 바게트 위에 얹어 먹는 서양식 타파스로 활용하는 식이다.
실제로 이 같은 모던한 재해석은 발상지인 하치조지마 현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섬 내에 위치한 창작 향토 이자카야 '에이트(Eight)' 등에서는 서양식 치즈 피자의 짭짤한 토핑으로 쿠사야를 활용한 '쿠사야 피자'를 선보이고 있다. 초심자들도 특유의 향에 거부감을 덜 느끼면서 깊은 감칠맛을 즐길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다.
소금 한 줌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던 섬마을의 애환은 수백 년의 발효를 거쳐 피자 토핑이자 와인 안주라는 흥미로운 모습으로 현대 일본 MZ세대의 곁에 다가왔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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