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김혜경은 옳고 김윤옥은 틀리다?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0-16 17:27:25

'한식이야기'에서 '밥을 지어요' 시대로... '시래기'가 얼어붙은 예산을 녹일 수 있을까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 제공 / Cook&Chef 제작

[Cook&Chef = 이경엽 기자] 이재명 대통령 내외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셰프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래기'를 이야기했다. 낯설지만 영리한 풍경이었다. 국정 메시지가 기자회견장이 아닌 예능 속 '한 끼 식사'에서 전해지는 시대, 한식은 이제 권력의 언어가 아닌 공감의 언어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며 십수 년 전, '한식 전도사'를 자처했던 김윤옥 여사의 얼굴을 떠올린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두 영부인이 '한식'을 향한 서로 다른 접근법을 이미 각자의 책에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한 명은 세계를 향해 '이야기'를 썼고, 다른 한 명은 일상의 '밥'을 지었다.

'한식이야기'와 311억 원의 시대 – 선언적 세계화

이명박 정부 시절, '한식 세계화'는 국가 브랜드 사업의 핵심이자 국정 과제였다. 그 선봉에는 김윤옥 여사와 그녀의 책『김윤옥의 한식이야기(HANSIK: Stories of Korean Food)』가 있었다. 영문으로 출간된 이 책은 외국 정상과 외교관에게 한국의 맛과 멋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외교 선물이었다. 궁중음식과 한정식을 중심으로 한 고급 한식의 세계화 전략, 즉 '품격 있는 한식'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는 한식을 문화 외교의 도구로 삼으려는 명확한 국가 전략이기도 했다.

이 시기 정부는 '보여주는 한식', 즉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한식의 대표 이미지를 설계했다. 2008년 30억 원으로 시작한 한식세계화 예산은 불과 3년 만인 2011년 311억 원으로 10배 넘게 급등했다. 한식당 표준모델 개발, 해외 홍보, 셰프 교육 등 거대한 프로젝트가 쏟아졌다.

그러나 결과는 냉정했다. 대중과의 공감대 없이 진행된 사업은 '보여주기식',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일부 사업은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고, '떡볶이 연구소' 같은 상징적 해프닝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짧게 말해, 한식의 세계화가 '예산의 세계화'로 착각된 시기였다.

정권 교체와 함께 사업은 빠르게 위축됐고, 2015년 예산은 109억 원으로 급감했다. 이후 사업 주체는 민간형 공공기관인 '한식진흥원'으로 재편되며, 정부 주도의 거대 담론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밥을 지어요'와 100억 원의 시대 – 공감의 세계화

시간이 흘러, K-컬처가 전 세계를 휩쓰는 시대가 왔다. 이제 한식은 '브랜딩'의 언어가 아니라 '공감'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김혜경 여사의 책 『밥을 지어요』가 있다. 이 책은 『한식이야기』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화려한 요리법 대신, 가족을 위해 짓는 한 끼 밥의 온기와 일상의 감정을 기록한다. ‘세계에 보여주는 음식’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음식’으로서의 한식을 말한다.

그 철학은 최근 대통령 부부의 예능 출연에서도 드러난다. 대통령의 냉장고 속 '시래기'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한식의 본질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과거 한식 세계화가 궁중요리와 연회 음식으로 한식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면, 지금은 소박한 반찬 하나로 한식의 ‘이야기’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이는 BTS, K-드라마, <기생충> 같은 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공감을 얻은 맥락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세계인들은 이제 ‘한국의 멋진 상차림’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 식탁’을 보고 싶어 한다.

철학은 진화했지만, 예산은 10년 전에 멈췄다

문제는 철학이 아니라 현실이다. ‘한식 세계화’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된 이후, 관련 예산은 완전히 활력을 잃었다.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ALIO)에 따르면, 한식진흥원의 연간 사업수익(정부 출연금 및 위탁사업비 포함)은 최근 5년간 110억~135억 원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15년 109억 원으로 축소된 이후 사실상 1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2021년에 134억 원으로 잠시 반짝 상승했지만, 그 이후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는 K-콘텐츠의 폭발적 성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K-팝, K-드라마, K-뷰티는 정부의 전략적 투자와 민간 혁신이 맞물리며 수조 원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반면 K-푸드는 여전히 정부 위탁사업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산이 없으니, 인재 양성도 어렵고, 한식 전문 콘텐츠 개발이나 해외 홍보 캠페인도 지속하기 힘든 형편이다. 말하자면, 한식 세계화의 '철학'은 진화했지만 '시스템'은 멈춰버린 셈이다.

K-푸드의 미래, 예능이 아니라 예산에 달렸다

시대는 분명 변했다. 한식은 더 이상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시키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언어가 지속적으로 번역되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다. '한식이야기'가 세계를 향한 선언이었다면, '밥을 지어요'는 우리 안의 공감으로 향하는 초대장이다. 담론은 진화했지만, 그 철학을 뒷받침할 정책과 예산은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대통령 부부의 예능 출연은 신선하고 영리한 시도였다. 그러나 시래기의 ‘이야기’가 진짜 힘을 가지려면, 정부가 다시 한식에 대한 공공투자를 고민해야 한다. ‘한식진흥원’이 10년째 유지해온 100억 원대의 운영 구조로는 K-푸드 산업의 질적 도약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식은 더 이상 국가 이미지의 부속물이 아니다. 세계 식문화의 변곡점에 서 있는 지금, 한식은 그 자체로 ‘지속 가능한 산업’이자 ‘문화 자산’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산과 정책의 재정비에서 비롯된다.

'밥 짓는 마음'으로 다가선 진정성이 과연 얼어붙은 예산까지 녹일 수 있을까. 결국, K-푸드의 미래는 예능이 아니라 예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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