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 없이 일본 국민 간식 된 '메론빵' 100년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09-07 15:00:30
[Cook&Chef = 이승우 기자] 흔히 앙금 없는 찐빵, 혹은 핵심이 쏙 빠진 상황을 두고 ‘홍철 없는 홍철팀’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농담 같은 상황을 무려 100년 전부터 현실로 구현해 낸 녀석이 바다 건너 일본에 있다. 동네 빵집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달콤한 버터 향으로 발걸음을 붙잡는 주범, 일본의 국민 간식 ‘메론빵(メロンパン)’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격자무늬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누구나 기묘한 의문에 빠진다. "잠깐, 멜론 맛이 하나도 안 나는데?" 그렇다. 정작 메론빵에는 멜론이 단 1그램도 들어가지 않는다. 과일 한 조각 없는 밀가루 빵이 어쩌다 ‘메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꿰찼고, 일본을 넘어 전 세계 베이커리 덕후들의 마음을 훔치게 된 걸까. 자, 지금부터 ‘메론 없는 메론빵’이 품고 있는 100년의 기막힌 진화 이야기에 집중해 보시라.
이야기는 1910년대 다이쇼(大正)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도쿄 제국호텔의 러시아 출신 제빵사 이반 사고요안이 프랑스식 제법을 응용해 빵 반죽 위에 쿠키 반죽을 얹어 구워낸 것이 시초로 통한다.
이름의 유래는 퍽 서글프면서도 낭만적이다. 가장 유력한 건 ‘머스크멜론 모방설’이다. 당시 일본에 막 수입되기 시작한 서양 멜론은 서민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최고급 사치품이었다. 그 닿을 수 없는 사치품의 촘촘한 그물눈 무늬를 빵 위에 칼집으로 흉내 내어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빵 위에 얹은 ‘머랭(Meringue)’ 반죽의 발음이 꼬여 메론빵이 되었다는 설도, 동양 참외(마쿠와우리)의 줄무늬를 본떴다는 설도 있지만, 결국 그 둥근 빵틀 안에는 달콤함에 대한 서민들의 짙은 동경이 깔려 있다.
일본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던 이 소박한 빵이 글로벌 신드롬으로 번진 건 2000년대 서브컬처의 힘이 컸다. 애니메이션 <작안의 샤나> 속 주인공이 목숨처럼 아끼는 간식으로, <호빵맨>의 사랑스러운 캐릭터 ‘메론빵나’로 미디어를 타면서 메론빵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일본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특히 화면 너머로 묘사되는 메론빵 특유의 ‘식감’은 전 세계 팬들의 침샘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단단하고 달달한 겉면의 쿠키 크러스트가 이 사이에서 바삭하고 부서지면, 뒤이어 버터 향을 품은 푹신한 빵 결이 입안을 부드럽게 감싼다. 이 완벽한 텍스처의 대비는 굳이 진짜 멜론 맛이 나지 않아도 메론빵을 찾게 만드는 마약 같은 매력이다.
흥미로운 건, 100년이 지난 지금 메론빵이 더 이상 ‘과일 흉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대체 멜론 맛은 언제 나냐”는 오랜 핀잔에 화답하듯, 최근 일본 외식업계는 진짜 멜론 과즙을 품은 프리미엄 메론빵 전쟁에 돌입했다.
패밀리마트가 크림빵 명가 핫텐도(八天堂)와 손잡고 낸 ‘시즈오카 크라운 멜론 크림빵’이나, 최고급 과일 전문점 신주쿠 타카노(新宿高野)의 부동의 1위 메뉴 ‘크리미 메론’이 대표적이다. 고급 멜론의 농축 퓨레를 듬뿍 짜 넣어, 베어 무는 순간 진짜 멜론 과육이 흘러내리는 듯한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도쿄 아사쿠사 등지에서는 얼굴보다 큰 갓 구운 ‘점보 메론빵’ 사이에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턱 끼워 파는 길거리 미식이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사치품을 향한 가난한 시절의 동경은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가장 트렌디하고 다채로운 일본의 빵 문화로 진화했다. 올가을, 일본의 어느 골목에서 고소한 버터 향이 코끝을 스친다면 주저 없이 메론빵 하나를 집어 들자. 멜론 없는 메론빵이 건네는 바삭하고 폭신한 위로는, 그 어떤 진짜 과일보다 달콤할 테니.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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