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한가위에는 무엇을 차렸을까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 2026-09-17 15:03:54

『승정원일기』와 왕실 음식 기록으로 살펴본 궁중의 음력 팔월 음식
토란탕, 추석 무렵 알이 굵어진 토란을 장국에 끓인 궁중의 음력 팔월 음식.  출처=역사넷

[Cook&Chef = 서진영 기자] 궁중의 한가위는 하나의 상차림으로 남아 있지 않다.

『별다례등록』과 『사중삭다례등록』, 왕실 각 궁의 『향수건기』, 1834년 『갑오 재동 제물정례책』에 음식의 이름과 재료가 흩어져 있다.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음력 팔월의 궁중의 가을을 준비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궁중의 음식에서 계절은 중요했다.

『효종실록』의 행장에는 어린 효종이 철따라 나는 과일을 처음 보면

“먼저 반드시 양전께 바친 뒤에야 맛보았다.”

고 기록돼 있다. 새로운 계절의 과실을 먼저 어른에게 올리고 난 뒤 먹었다는 이야기다. 제철에 처음 난 것을 귀하게 여긴 궁중의 음식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734년 영조에게 도제조 서명균이 강원도 흡곡의 게장이 이름난 음식이라고 권하자 영조는 이미 제철이 지난 음식이라면 맛이 반드시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답했다. 궁중에서도 이름난 음식보다 제철에 제대로 맛이 오른 음식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음력 팔월이 되면 음식도 달라졌다

궁중의 음식 기록은 계절을 따라 색과 맛이 달라진다.

『사중삭다례등록』은 음력 2월·5월·8월·11월, 계절의 가운데 달에 사용한 음식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7월 기록 하나가 별도로 더해져 있는데 ‘신도미 천신 겸향’이라 적었다. 신도미(新稻米), 그해 처음 거둔 햅쌀이다. 본격적인 팔월이 오기 전부터 궁중의 음식에는 새로운 곡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834년 『갑오 재동 제물정례책』에는 복온공주의 팔월 음식으로 배와 포도, 조홍, 송병, 새로 난 밤을 조린 신율조리니, 어만두탕과 토란탕이,

『별다례등록』에는 배와 침시, 포도, 생률, 생률병, 동아정과, 송병, 수어전유화, 각색어만두, 진계적과 병시가 기록 돼 있다. .

경우궁의 『향수건기』에서는 배와 홍시, 석류, 포도, 생률, 율병, 송병, 생선전유아와 병시가 확인된다.

세 기록의 상차림은 같지 않지만 반복되는 식재료는.

배와 포도, 감, 밤.

여기에 생선과 닭, 토란이 더해졌다.

궁중의 한가위에도 가을에 가장 맛이 오른 재료가 으뜸이였다.

햇밤 한 가지도 여러 음식이 됐다

가을 햇밤  출처=지리산농부마을

밤은 궁중음식에서 특히 자주 보인는데, 깐 생밤을그대로 먹는 생률이 있었고, 밤을 이용한 율병과 생률병이 있었다. 『갑오 재동 제물정례책』에는 새로 난 밤을 조린 ‘신율조리니’가 등장한다.

신율(新栗)은 햇밤이다.

햇밤을 꿀이나 조청에 조려 윤기를 내고 단맛을 입혔다. 밤을 그대로 먹는 생률과는 또 다른 맛이다. 같은 햇밤이 생과가 되고, 떡이 되고, 숙실과가 됐다.

감도 하나로 기록되지 않았고 홍과 홍시, 침시가 따로  등장한다.

조홍은 이른 시기에 익은 붉은 감으로, 홍시는 충분히 익혀 부드럽게 먹었고, 침시는 단단하고 떫은 감을 물에 담가 떫은맛을 없앤 것이다.

같은 감이라도 익은 정도에 따라 먹는 방법이 달랐다.

궁중 음식에서 보이는 것은 단순히 많은 식재료가 아닌, 한 재료가 가장 맛있는 때를 살펴 다양한 방법으로 먹었던 흔적이다.

토란도 이 계절에 빠지지 않은 중요한 재료였다.

『별다례등록』과 『갑오 재동 제물정례책』에는 모두 토란탕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시의전서』에는 토란국을 끓이는 법과 함께 “닭을 넣으면 좋다”고 한다.

토란은 생으로 먹으면 아린맛이 강해 삶아 아린맛을 걷어내고 탕에 넣으면 속은 부드러워지고 특유의 매끄러운 질감이 남는다.

민간과 궁중에서 먹던 토란국과 재료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만두  사진=서진영 기자

생선은 전이 되고 만두가 됐다

『별다례등록』에는 수어전유화와 각색어만두가 기록돼 있고, 『갑오 재동 제물정례책』에는 어만두탕이 등장한다. 경우궁의 기록에도 생선전유아가 보인다.

생선 한 가지가 서로 다른 음식이 됐다.

얇게 저며 밀가루와 달걀을 입혀 지지면 전유어가 되고, 살을 넓게 떠 소를 감싸면 어만두가 됐다.

『주찬』에는 어만두탕의 조리법이 남아 있다.

장국을 끓인 뒤 어만두를 넣고 달걀을 풀어 넣은 다음 산초가루를 뿌렸다. 『시의전서』에서는 어만두의 생선으로 민어·숭어·도미를 사용했으며, 궁중에서는 숭어를 많이 이용한 것으로 전한다.

생선의 살을 만두피로 사용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밀가루피 안에 생선을 넣은 만두가 아니라, 생선 자체가 피가 됐다.

좋은 생선을 골라 넓게 포를 뜨는 손질부터 필요했다.

궁중음식의 섬세함은 새로운 식재료보다 한 재료를 여러 모습으로 바꾸는 조리에서 드러난다.

병시도 여러 왕실 기록에서 함께 나타난다.

병시는 밀가루 반죽에 소를 넣어 반달 모양으로 빚고 장국에 끓인 만두다. 팔월 기록에서 송병과 병시가 함께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쌀은 송편이 되고 밀은 만두가 됐다.

동아와 게도 음력 팔월의 음식이었다

지금은 한가위 음식으로 쉽게 떠올리지 않는 재료, 동아다.

여름에 크게 자라 가을까지 먹을 수 있는 동아는 수분이 많고 맛이 강하지 않다. 궁중에서는 이런 성질을 이용해 여러 음식을 만들었다.

『별다례등록』에는 동아정과가 기록돼 있다. 『주찬』에는 동아를 얇게 저며 고기를 넣고 말아 지지는 동아느름적의 조리법이 남아 있다. 이후 궁중음식 전승을 기록한 『이조궁정요리통고』에는 동아를 얇게 저며 소고기와 닭고기 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접어 찌는 동아만두가 기록됐다.

같은 동아가 정과가 되고 느름적과 만두가 됐다.

가을의 게도 궁중에서 또한 중요한 재료였다.

왕실의 가을 음식 기록에는 생게로 만든 해전이다. 게살을 발라 전유화처럼 지지거나 게딱지에 고기와 채소, 두부를 섞은 소를 다시 채워 지지는 방법이 있었다.

『승정원일기』에서 영조가 제철이 지난 게장은 맛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기록과도 이어진다. 좋은 음식은 귀한 음식이기 전에 때를 놓치지 않은 음식이었다.

궁중의 한가위는 한 가지 상이 아니었다

왕실의 팔월 음식을 기록한 문헌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복온공주의 음식과 『별다례등록』의 음식, 경우궁의 음식은 서로 다르다.

어느 상에는 토란탕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병시가 있다. 어떤 곳에서는 조홍을 쓰고 다른 곳에서는 홍시와 석류를 올렸다. 생선을 전유어로 만들기도 하고 어만두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포도와 배, 감과 밤은 반복해서 나타난다.

왕실의 한가위에도 하나의 고정된 메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상과 시기, 계절의 식재료에 따라 음식이 달라졌다.

궁중의 추석 음식을 찾을 때 연향을 기록한 의궤의 화려한 상차림만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에 확인되는 팔월의 음식은 오히려 『별다례등록』과 『사중삭다례등록』, 각 궁의 『향수건기』와 음식발기처럼 일상의 왕실 음식 운영에 가까운 기록에 더 세밀하게 남아 있다.

기록 속 궁중의 한가위는 생각보다 친숙하다.

포도가 익고 배가 들었다. 햇밤을 먹고 토란을 끓였다. 생선으로 전을 부치고 만두를 빚었다.

다만 같은 재료를 하나의 조리 방식으로 머물지 않았다.

밤은 생으로 먹고 조리고 떡으로 만들었다. 감은 익은 정도에 따라 달리 먹었다. 생선은 전과 만두가 됐고, 동아는 정과와 느름적, 만두로 모습을 달리했다.

왕실의 한가위가 화려했던 것은 식재료가 모두 특별해서만은 아니었다.

가을에 난 재료를 가장 좋은 때 골라, 여러 맛과 질감으로 풀어낸 데 있었다.

궁중의 음력 팔월에도 그렇게 가을의 맛과 색이 차려졌다.Cook&Chef /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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