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인문학] 술 빚는 날도 따로 있었다?

신현우 기자

cnc02@hnf.or.kr | 2026-10-16 15:01:11

술의 시조가 죽은 날에는 술을 빚지 않았다…좋은 술을 위한 선조들의 길일과 금기

[Cook&Chef = 신현우 기자] 이사를 앞두고 달력을 살피다 보면 흔히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바로 '손 없는 날'이다.

손 없는 날은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해를 끼친다고 여겨지는 귀신인 '손(損)'이 없는 날을 뜻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사나 혼례, 집을 짓는 일처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좋은 날을 골라 탈 없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이사 날짜를 정하거나 결혼식을 준비할 때 길일을 따지기도 한다.

이처럼 날짜의 길흉(吉凶)을 따지는 택일(擇日) 문화는 집안의 큰 행사뿐 아니라 일상적인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을 담그거나 식초를 만들 때도 좋은 날을 골랐으며, 술을 빚을 때 역시 날짜의 길흉을 따졌다.

오늘날 술을 빚는 사람들은 쌀과 누룩, 물의 비율을 정하고 온도와 습도 등 발효 환경을 살핀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바로 술을 빚는 날짜였다.

술을 빚기 좋은 날이 따로 있었고, 반대로 피해야 할 날도 있었다. 심지어 술의 시조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날에는 술을 빚지 않는다는 금기까지 존재했다. 이러한 풍습은 단순한 구전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술을 빚는 길일과 금기일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술의 시조가 죽은 날에는 술을 빚지 않았다
조선 후기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편찬한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술을 빚는 날짜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홍만선이 편찬한 <산림경제>의 술 빚는 길일 관련 기록. '조주길일(造酒吉日)'이라는 제목 아래 술을 빚기 좋은 날과 피해야 할 날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특히 술의 시조로 전해지는 두강이 죽은 날이라는 이유로 정유일(丁酉日)을 금기일로 기록한 점이 눈길을 끈다. 사진=한국고전종합DB

<산림경제> 제 2권의 양주(釀酒)에는 술을 빚기 좋은 날을 뜻하는 '조주길일(造酒吉日)'이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술을 빚기 좋은 날은 정묘(丁卯), 경오(庚午), 계미(癸未), 갑오(甲午), 기미(己未)일이다. 반대로 무자(戊子), 갑진(甲辰), 정유(丁酉)일은 피해야 할 날로 적었다.

여기서 날짜는 오늘날 달력에 표시된 1일이나 15일과 같은 숫자가 아니다.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조합한 육십갑자(六十甲子)에 따른 것으로, 같은 이름의 날이 60일마다 돌아오는 방식이다.

특히 정유일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정유일에 대해 '두강사일(杜康死日)'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술의 시조로 알려진 두강이 죽은 날이라는 뜻이다. 두강은 중국에서 술을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후대에는 그의 이름이 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만큼 술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현재 두강이 실제 정유일에 사망했다는 다른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술의 시조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날을 술 빚기의 금기일로 여겼다는 점에서 당시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규합총서>에도 기록된 술 빚는 길일
술을 빚는 날짜를 따지는 풍습은 다른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집필한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술을 빚기 좋은 날을 설명하는 항목이 수록돼 있다.

<규합총서>는 조선시대 가정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정리한 책이다. 음식과 술을 만드는 방법은 물론 의복과 가정관리, 다양한 생활 지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술 빚는 길일'을 비롯해 술이 시어졌을 때 이를 다루는 방법도 등장한다. 또한 장과 식초를 만들기 좋은 날까지 기록돼 있어 발효식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날짜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식초를 만드는 길일로 신미(辛未), 경자(庚子), 을미(乙未)일을 소개하면서 술을 빚는 길일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술과 식초처럼 발효 과정을 거치는 식품을 만들 때 날짜를 고르는 일이 하나의 생활 지식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발효식품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조선시대 장 담그기 풍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신일(辛日)에 장을 담그면 장맛이 시어진다고 여겼다. '신(辛)'이라는 글자의 소리가 신맛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속신은 성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씨 성을 가진 집안에서 장을 담그는 것을 꺼리거나,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에게 장 담그기를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서 신일의 '신(辛)'과 신씨 성의 '신(申 또는 辛)'은 반드시 같은 한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에서 연상되는 의미를 금기와 연결한 민간의 관념이었다. 오늘날에는 미신으로 여겨질 만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풍습은 우리 선조들이 발효식품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술과 장은 모두 귀한 곡식이나 콩을 사용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얻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한번 발효에 실패하면 재료와 노력을 잃게 되는 만큼 그 과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조들이 길일을 고르고 금기를 지킨 배경에는 발효의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과 함께 불확실한 결과를 경계하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돼지날에 세 번 빚는 술, 삼해주

서울특별시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삼해주(三亥酒)를 빚는 모습. 삼해주는 음력 정월 첫 돼지날(亥日)에 밑술을 빚고, 이후 돌아오는 돼지날에 덧술을 하는 전통주로, 우리 선조들이 술을 빚는 날짜를 중요하게 여겼던 양조문화를 보여준다. / 사진=국가유산포털.

술을 빚는 날짜가 이름에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삼해주(三亥酒)다. 삼해주는 이름 그대로 세 번의 해일(亥日), 즉 돼지날에 걸쳐 빚는 술이다.

우리 선조들은 열두 지지를 이용해 날짜를 구분했는데, 해(亥)는 돼지에 해당한다. 해일은 12일마다 돌아온다. 삼해주는 일반적으로 음력 정월 첫 돼지날에 밑술을 빚고, 이후 돌아오는 돼지날마다 덧술을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산가요록>, <음식디미방>, <산림경제> 등 여러 문헌에 제조법이 기록돼 있으며, 재료와 구체적인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산림경제>에서는 정월 첫 해일에 찹쌀로 죽을 쑤어 밑술을 빚고, 두 번째 해일에는 찹쌀과 멥쌀로 만든 술떡을 넣는다. 세 번째 해일에는 다시 쌀을 이용해 덧술하고 약 3개월 동안 익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첫 밑술을 빚은 날부터 마지막 덧술까지는 24일의 간격이 발생한다. 이후에도 상당한 숙성 기간이 필요한 술이다. 삼해주의 이름에는 우리 선조들의 날짜에 대한 관념뿐 아니라 술을 빚는 일정까지 담겨 있다. 12일마다 돌아오는 돼지날에 맞춰 술을 빚으면 밑술부터 마지막 덧술까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게 된다.

이처럼 술을 빚는 날짜는 길흉을 따지는 기준인 동시에 제조 과정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다만 삼해주가 처음부터 발효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돼지날을 선택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돼지날에 맞춰 여러 차례 술을 빚는 전통이 문헌에 기록돼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미신과 경험 사이, 술이 익는 시간
오늘날 양조학의 관점에서 보면 날짜의 길흉이 술의 발효를 결정한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술의 맛과 향은 누룩과 효모의 상태, 원료의 품질, 발효 온도와 산도, 위생관리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길일에 술을 빚었다고 반드시 좋은 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금기일에 빚었다고 술이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술을 빚는 날짜를 정하고 여러 금기를 지켰던 풍습을 단순히 미신으로만 치부할 필요는 없다.

당시 발효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익힌 기술이었지만, 그 결과를 완전히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귀한 곡식으로 술을 빚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 날을 택하고 부정을 피하려는 행동은 불확실한 발효 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기원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규합총서>에 등장하는 술의 신맛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 선조들이 술 빚기의 문제를 단순히 길흉에만 의존해 해결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날짜의 길흉을 따지는 관념과 오랜 경험으로 축적한 양조 기술이 함께 전해졌던 셈이다.

오늘날에는 발효에 관여하는 미생물의 역할을 이해하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보다 안정적으로 술을 빚을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길일을 기다려 술을 빚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옛 문헌에 남아 있는 길일과 금기일은 한 잔의 술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생활문화와 믿음을 돌아보게 한다.

술맛을 결정하는 것은 좋은 날이 아니라 좋은 발효 환경이다. 하지만 귀한 곡식으로 술을 빚고, 술독을 살피며 무사히 익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Cook&Chef / 신현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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