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밥상의 완성, 토란국과 백주에 담긴 건강과 풍류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0-06 12:00:55
[Cook&Chef = 이경엽 기자] 풍성한 한가위 밥상은 송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추석 상차림을 하나의 작은 우주로 여겼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 자란 귀한 햅쌀(송편과 밥), 땅의 표면에서 다채로운 생명력을 뽐내는 채소(나물과 전), 그리고 땅속 깊은 곳에서 묵묵히 영양을 비축한 뿌리(토란)까지, 자연의 모든 결실을 한 상에 올려 감사를 표현했다.
송편이 달을 향한 소망의 상징이라면, 구수한 국물로 명절의 시작을 알리는 토란국부터 첫 수확의 기쁨을 담은 백주(白酒), 살 오른 황계(햇닭), 그리고 오색 빛깔의 전(煎)과 나물은 풍요 그 자체를 맛보고 나누는 즐거움의 중심에 있었다. 송편 너머, 우리네 한가위 밥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던 절기 음식들의 숨은 매력과 그 안에 담긴 지혜를 더욱 깊이 살펴본다.
땅속의 지혜, ‘속 편한 국’ 토란국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식재료인 토란(土卵)은 이름 그대로 ‘흙 속의 알’이라는 뜻이다. 겉은 투박한 흙투성이지만, 속살은 뽀얗고 부드러운 반전 매력을 지녔다. 김정숙 전남과학대학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열두 달 세시풍속과 절기음식』에서, 기름진 음식이 넘쳐나는 명절에 우리 조상들이 토란국을 챙겨 먹은 데에는 단순한 미식을 넘어선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토란을 손질할 때 나오는 특유의 미끈거리는 점액질 성분은 ‘뮤신(mucin)’과 ‘갈락탄(galactan)’이다. 이 성분들은 위벽을 코팅하여 보호하고 단백질의 소화 흡수를 도우며 장운동을 활발하게 한다. 이는 전, 튀김, 고기 등 기름진 음식으로 과식하기 쉬운 명절에 배탈을 예방하고 속을 편안하게 다스려주는 천연 소화제와 같았다. 또한, 풍부한 칼륨은 몸속 나트륨 배출을 도와 혈압 조절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니, 풍성한 상차림의 영양적 균형을 잡아주는 ‘밥상의 현자(賢者)’였던 셈이다.
물론 토란을 다루는 데는 지혜가 필요했다. 특유의 아린 맛을 내는 옥살산칼슘 성분은 반드시 제거해야 했는데, 조상들은 쌀뜨물에 담가두거나 소금물에 한 번 데쳐내는 방식으로 이 아린 맛을 말끔히 잡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토란은 부드럽고 구수한 본연의 맛을 드러냈다.
토란국은 지역에 따라 개성이 뚜렷했다. 서울을 포함한 중부지방에서는 쇠고기 양지머리 육수에 토란과 다시마를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해 맑고 담백하게 끓여냈다. 토란 고유의 포슬포슬한 식감과 깔끔한 국물 맛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반면, 남도 지방에서는 들깨 즙을 넉넉하게 풀어 걸쭉하고 고소한 맛을 더해 한층 더 풍성한 가을의 별미로 즐겼다. 어떤 방식이든, 땅의 기운을 오롯이 품은 토란국 한 그릇은 명절의 시작을 알리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환영 인사였다.
하늘의 선물, 첫 수확의 기쁨을 담은 백주(白酒)와 황계(黃鷄)
인심이 후해지는 명절에 술과 안주가 빠질 수 없다. 추석에 마시는 술은 특별히 백주(白酒)라 불렸는데, 이는 다른 첨가물 없이 그해 가을 하늘 아래서 익은 햅쌀로 맑게 빚었다는 의미다. 같은 이유로, 첫 수확한 벼로 빚은 술이라 하여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과거 각 가정에서는 저마다의 비법으로 술을 빚는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있었고, 추석에 빚는 신도주는 한 해 농사의 결실을 자축하는 가장 상징적인 술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술이 ‘천신(薦新)’ 의례의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맛보기 전에 먼저 조상과 신께 올려 한 해의 풍년에 대한 감사를 고하는 경건한 제물이었던 것이다. 농사의 고단함을 잊고 풍년을 자축하며 나누어 마시는 신도주 한 잔에는 단순한 취기를 넘어 한 해의 노고에 대한 보상과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이 귀한 술에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로는 황계(黃鷄), 즉 햇닭을 쳤다. 봄에 태어난 병아리가 여름 내내 들판의 벌레와 곡식을 먹고 자라, 가을 추석 무렵이면 살이 통통하게 올라 가장 맛과 영양이 좋을 때이기 때문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처럼, 닭은 예로부터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최고의 정성을 상징했다. 오랜 시간 푹 고아 진한 국물을 내는 씨암탉과 달리, 추석에 먹는 햇닭은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워 통째로 쪄내거나 맑게 탕을 끓여 고기 본연의 맛을 즐기기에 좋았다. 잘 삶아낸 닭고기에 햅쌀로 빚은 신도주 한 잔을 곁들이는 것은, 가을의 풍요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최고의 풍류였다.
땅의 다채로움, 삼색나물과 오색전
추석의 풍성함은 땅 위에서 자란 채소들로 완성된다. 삼색나물과 오색전은 밥상의 색감과 영양을 책임지는 중요한 조연이었다.
차례상에 오르는 삼색나물은 보통 흰색의 도라지, 갈색의 고사리, 초록색의 시금치로 구성된다. 여기에도 깊은 뜻이 있다. 뿌리채소인 흰색 도라지는 조상과 뿌리를, 줄기인 갈색 고사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를, 잎인 초록색 시금치는 미래에 뻗어나갈 자손을 상징했다. 즉, 삼색나물 한 접시에는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가족의 역사와 번영에 대한 기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추석 전날이면 집안 가득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부쳐내던 오색전은 명절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다진 고기와 두부로 빚은 동그랑땡, 뽀얀 동태전, 노란 호박전, 초록빛 고추전 등 다채로운 색감의 전은 그 자체로 풍요를 상징했다. 기름에 지지는 조리법은 부(富)와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여러 재료를 하나하나 정성껏 부쳐내는 과정은 가족의 화합을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의 한가위 밥상, 전통과 현대를 잇다
이 외에도 추석 밥상에는 햇밤을 삶아 꿀에 뭉친 밤단자나 토란을 으깨어 빚은 토란단자 같은 소박한 가을 디저트들이 곁들여졌다.
오늘날, 우리는 전통적인 추석 상차림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도한 상차림의 부담은 내려놓되, 그 본질인 ‘천신(薦新)-나눔-안전’의 정신은 되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땅에서 갓 수확한 토란, 햅쌀, 밤, 대추 등 제철 로컬 식재료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현대적인 조리법과 결합해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한가위 밥상을 만들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다.
예를 들어, 맑은 토란국에 다양한 가을 버섯과 채소를 듬뿍 넣어 현대적인 보양식으로 재해석하거나, 햅쌀 막걸리(신도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닭가슴살 냉채(황계)를 준비하는 식이다. 온 가족이 모여 각자 맡은 전을 부쳐 ‘모둠전 플래터’를 만들거나, 삼색나물을 다져 넣어 라이스페이퍼에 싼 ‘나물 쌈’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
형식의 무게에 짓눌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수확에 대한 감사’와 ‘함께 나누는 마음’을 기억할 때, 우리의 한가위 밥상은 세대를 넘어 더욱 풍성하고 의미 깊은 축제의 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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