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탐구] 밤 한 알에 담긴 가을의 맛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 2026-10-06 15:02:21

생률부터 밤죽·다식·단자까지 이어진 밤 음식
말리고 빚고 조리며 계절을 건넌 우리 식문화
[부여에서는 제철을 맞은 밤 수확이 한창이다. / 사진=서진영기자]

[Cook&Chef = 서진영 기자]가을이면 충남 공주와 부여, 청양을 비롯해 경남 산청과 하동, 전남 광양과 순천 등 밤 산지에서 수확이 이어진다. 벌어진 밤송이 안에는 윤기 나는 갈색 열매가 들어 있다. 단단한 겉껍질과 떫은 속껍질을 벗기면 노란 속살이 드러난다. 날로 먹을 때는 아삭하고 은은하게 달지만, 삶으면 포슬포슬해지고 구우면 구수한 향이 짙어진다. 같은 밤이라도 어떻게 익히고 손질하느냐에 따라 맛과 쓰임이 다양해진다.

밤을 먹고 음식으로 만들어 온 역사는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에서 엿볼 수 있다. 마한에서 굵기가 배만 한 밤이 난다는 기록이 있고, 『수서』와 『북사』에도 백제의 큰 밤이 등장한다. 밤은 그 크기와 품질이 일찍부터 알려진 과실이었다. 전분이 풍부해 허기를 달래는 먹거리가 됐으며, 정성껏 손질하고 가공하면 잔칫상과 의례상에 올리는 음식이 됐다.

허기를 견디게 하는 밤의 성질은 『동의보감』에도 기록돼 있다. 밤을 ‘율자(栗子)’라는 이름으로,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다고 했다. “기를 돕고 장위를 튼튼하게 하며 신기를 보하고 허기를 견디게 한다”고 적어 밤을 유익한 과실로 평가했다. 먹는 방법과 보관법도 함께 실었다. 뜨거운 잿불에 묻어 진이 나오도록 구워 먹는 방법을 소개하고, 말릴 때는 햇볕에 말리도록 했다. 생밤은 습기가 있는 모래에 묻어 두면 늦봄과 초여름까지 갓 딴 것처럼 간직할 수 있다고 했다. 열매의 성질에서 수확한 밤을 오래 두고 먹는 방법까지 담은 기록이다.

밤을 갈무리하는 수고에는 일상의 먹거리와 의례에 쓸 과실을 마련하는 뜻도 있었다. 제사상에는 껍질을 벗기고 각이 지도록 다듬어 높이 괴어 올렸다. 혼례의 폐백에서는 자손을 기원하는 과실로 쓰인다.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밤을 던져 주는 풍속에는 아들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겼다. 한 알의 밤에 집안의 번성과 자손에 대한 바람을 더한 것이다.

의례상에 정성껏 다듬어 올리던 밤은 술을 대접하는 주안상에서도 친숙한 안주였다. 껍질을 벗긴 생률은 단단하게 씹히며 담백한 단맛을 낸다. 『이춘풍전』에서 추월이 이춘풍에게 차려 내는 술상에도 생률이 등장하는데, 여러 안주와 과일 사이에 놓인 생률에서 술상에 계절의 과실을 곁들였다.

[밤과 쌀을 함께 끓여 부드럽게 만든 밤죽 / 출처=만개의레시피]

밤가루의 고소함, 찹쌀의 차진 맛
생률의 아삭한 질감은 불과 물을 거치며 부드럽게 바뀐다. 밤을 익혀 곡식과 함께 먹는 방법은 죽과 떡으로 이어졌다. 『산림경제』와 『임원경제지』 등에는 밤죽이 소개됐다. 밤죽은 밤가루와 쌀가루를 함께 끓여 만든다. 두 가루가 익으며 부드럽게 풀어지고, 밤의 은은한 단맛과 고소함이 더해진다. 씹어 먹던 밤을 따뜻하고 든든한 한 그릇으로 먹는 방법이다. 『음식디미방』에는 밤설기떡도 소개돼 있어, 밤을 떡으로 만들어 먹던 조리법을 볼 수 있다.

밤을 가루로 쓰는 음식에는 말린 밤인 황률도 두루 이용됐다. 수확한 밤을 말려 두었다가 삶거나 가루를 내면 계절이 지난 뒤에도 밤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규합총서』의 밤조악은 황률가루를 곱게 쳐서 꿀로 반죽하고, 잣가루와 계피, 말린 생강가루에 꿀을 섞은 소를 넣어 작게 빚는다. 겉에도 꿀을 바르고 잣가루를 묻힌다. 곱게 낸 밤가루는 꿀을 만나 촉촉하게 뭉쳐지고, 밤과 잣의 고소함 사이로 계피와 생강의 향이 돈다.

밤조악이 반죽에 소를 넣어 빚는 음식이라면, 황률다식은 밤가루와 꿀을 반죽해 틀에 찍는다. 『규합총서』에는 속껍질을 없앤 밤을 곱게 가루 내고 꿀로 반죽해 충분히 치대는 방법이 담겨 있다. 가루가 거칠거나 반죽이 알맞지 않으면 빛깔과 맛이 떨어진다는 설명도 적혀있다. 가루를 곱게 내고 반죽을 매끈하게 만드는 솜씨가 작은 다식 한 점의 질감을 결정했다. 한입 베어 물면 밤의 고소함과 꿀의 단맛이 함께 입안에서 퍼진다.

밤가루를 꿀로 반죽해 다식을 만들었다면, 밤단자에는 찹쌀의 찰기를 더했다. 『시의전서』의 밤단자는 찹쌀가루로 구멍떡을 만들어 삶은 뒤 건져 힘 있게 치고, 삶은 밤은 껍질을 벗기고 으깨 체에 내린다. 밤가루 일부에 꿀과 계피를 섞어 소를 만들고, 찹쌀떡으로 감싸 새알처럼 빚는다. 겉에도 꿀을 바르고 밤가루를 묻힌다. 첫입에는 고소한 밤가루가 닿고, 씹을수록 쫀득한 찹쌀과 달콤한 밤소가 어우러진다. 밤의 포슬한 질감과 찹쌀의 차진 맛을 한데 담은 떡이다.

이렇게 만든 밤단자는 절기상에도 올랐다. 『시의전서』의 시식 기록에는 중양절뿐 아니라 한식에도 밤단자가 등장한다. 밤을 수확하는 가을을 넘어 봄의 절기에도 밤 음식을 마련한 것이다. 밤을 말려 두었다가 필요할 때 다시 손질해 쓰면 계절이 지난 뒤에도 밤의 맛을 누릴 수 있다.

다례상에 올린 밤, 꿀로 조린 한 알
왕실의 가을 다례상에서도 밤단자를 비롯한 여러 밤 음식을 볼 수 있다. 새로 난 제철 먹거리를 먼저 올리는 천신의 음력 8월 품목에 밤이 포함됐으며, 다례상에서는 단자와 다식, 숙실과로 모습을 달리했다. 궁중음식연구원 이소영이 『갑오 재동 제물정례책』을 중심으로 살핀 복온공주 다례 기록에는 추석 음식으로 ‘신율조리니’가 등장한다. 햇밤을 꿀이나 조청에 조린 숙실과다. 함께 비교한 왕실 다례 기록에서도 전율과 율단자, 율다식 등 여러 밤 음식을 확인할 수 있다.

전율과 신율조리니는 통밤의 모양을 살려 꿀이나 조청으로 단맛을 들인 음식이다. 이 연구에서 설명한 율병은 삶은 밤을 으깨 다시 밤 모양으로 빚은 율란이다. 통째로 조린 밤은 부드러운 속살을 씹는 맛이 있고, 으깨 빚은 율란은 고운 밤살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밤을 조리고, 으깨고, 가루 내는 손길에 따라 한 재료가 서로 다른 음식으로 완성됐다.

통밤의 모양을 살려 조리는 방법은 밤초에서도 볼 수 있다. 껍질을 벗긴 밤을 살짝 데친 뒤 설탕과 꿀을 넣어 조리고, 거의 졸았을 때 계핏가루를 더해 잣가루를 뿌리는 숙실과다. 『조선요리제법』에는 밤초,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밤초와 율초(栗炒), 『시의전서』에는 밤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돼 있다. 전국적으로 먹었으며 특히 서울과 경기에서 즐겨 먹었다.

밤초는 밤이 부서지지 않도록 불을 조절하며 단맛을 천천히 들인다. 설탕물이 끓으면 불을 낮추고 거품을 걷어 낸다. 조림물이 거의 줄었을 때 꿀을 넣어 잠시 더 조리고 계핏가루로 향을 더한다. 밤에 윤기가 돌면 그릇에 담아 잣가루를 뿌린다. 한 알을 베어 물면 부드럽고 포슬한 속살에 달콤한 맛과 계피 향이 돌고, 잣가루가 고소함을 더한다. 가을에 거둔 밤을 손질해 따뜻한 차에 곁들일 한 접시로 낸다.

[밤을 설탕과 꿀에 조린 뒤 계핏가루로 향을 더하고 잣가루를 뿌린 숙실과, 밤초. / 출처=농사로]

밤초 만들기

재료
밤 320g, 설탕 60g, 물 300mL, 꿀 60g, 계핏가루 5g, 잣가루 약간.

1.밤의 겉껍질과 속껍질을 깨끗하게 벗겨 물에 담가 둔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건진다.
2.냄비에 밤과 물, 설탕을 넣고 센 불에서 끓인다. 끓어오르면 불을 약하게 줄이고 거품을 걷어 낸다.
3.설탕물이 2큰술 정도 남으면 꿀을 넣어 잠시 더 조린다. 계핏가루를 넣고 고루 섞는다.
4.그릇에 담고 잣가루를 뿌린다.
Cook&Chef /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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