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이 일본] 자판기 캔에 담긴 경양식 수프, '콘 포타주'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10-03 15:01:01

프랑스 요리가 길거리 자판기 속에서 40년간 사랑받아

[Cook&Chef = 이승우 기자] 우리는 흔히 길거리 자판기에서 얻을 수 있는 맛의 범주를 한정 짓곤 한다. 갈증을 해소해 줄 이온 음료나 탄산음료, 조금 더 발달한 곳이라 해도 출출함을 달랠 에너지바 정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옷깃을 여미게 되는 쌀쌀한 날씨, 얼어붙은 몸을 단숨에 데워줄 갓 끓여낸 듯 진한 수프를 길거리 자판기에서 뽑아 마실 수 있다면 믿겠는가. 심지어 톡톡 터지는 옥수수 알갱이까지 듬뿍 들어있어 속까지 든든하게 채워준다. 바로 가을·겨울철 일본 여행의 숨은 구원자, ‘콘 포타주(コーンポタージュ)’ 캔 음료 이야기다.

바쁜 직장인의 ‘모닝 수프’가 된 프랑스 요리

‘포타주(Potage)’는 본래 채소를 푹 끓여낸 프랑스의 걸쭉한 국물 요리를 뜻한다. 우아하게 스푼으로 떠먹어야 할 이 서양식 수프가 어쩌다 차가운 철제 캔에 담겨 길거리 자판기로 들어오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은 1980년대 일본의 온·냉장 겸용 자판기 보급과 직장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다. 1982년, 일본의 음료 기업 ‘포카(현 포카삿포로)’는 추운 겨울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밥 대신 빠르고 간편하게 속을 달랠 수 있는 음료를 고민했다. 그렇게 자판기 전용 보온 캔에 담긴 콘 포타주가 탄생했고, 달콤하고 따뜻한 국물로 바쁜 현대인의 허기를 달래주며 단숨에 일본의 국민 겨울 음료로 등극했다.

아사히부터 산토리 보스까지… 음료 명가들의 ‘진한 맛’ 전쟁

오늘날 일본의 자판기를 들여다보면 특정 브랜드가 아닌, 일본의 내로라하는 음료 대기업들이 저마다의 비법을 담은 콘 포타주를 내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국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수프를 넘어 ‘먹는(食べる)’ 수프를 표방하며 아삭한 식감의 슈퍼 스위트 콘 알갱이를 아낌없이 넣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자판기나 편의점 온장고에서는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제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산토리(Suntory)는 자사의 캔커피 브랜드 ‘보스(BOSS)’의 이름을 딴 ‘비스트로 보스(BISTRO BOSS)’ 콘 포타주를 통해 깊은 감칠맛을 내세우며, 기린(KIRIN)은 ‘세계의 주방에서’ 시리즈로 옥수수에 치즈를 더해 한층 농밀하고 진한 맛을 구현했다. 이 밖에도 아사히(Asahi)의 ‘코쿠우마(コクうま)’나 다이도(DyDo)의 ‘코쿠토로(コクとろ)’ 등 브랜드마다 ‘진하고(濃厚)’, ‘걸쭉한(とろ~り)’ 풍미를 강조하며 옥수수 알갱이의 식감과 국물의 밸런스를 맞추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알갱이를 빼먹기 위한 유체역학적 고군분투

이처럼 풍성한 옥수수 알갱이 때문에 웃지 못할 현상도 벌어진다. 국물을 다 마시고 나면 무거운 옥수수 알갱이들만 캔 바닥에 들러붙어 나오지 않는 이른바 ‘알갱이의 딜레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캔을 시계 방향으로 둥글게 돌리며 마시거나, 캔 입구 바로 아래를 꾹 눌러 움푹 파이게 만든 뒤 마시는 유체역학적 꿀팁까지 공유한다. 음료 회사들 역시 캔 입구 아래에 인공적인 굴곡(딤플)을 만들어 알갱이가 쉽게 흘러나오도록 캔 디자인을 과학적으로 진화시키고 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명소를 누벼야 하는 여행객에게 찬 바람은 불청객이다. 다가오는 늦가을과 겨울, 일본 여행 중 몸이 으스스 떨린다면 주저 없이 길모퉁이 자판기의 붉은색 버튼을 눌러보자. 단돈 140엔 남짓에 손안으로 굴러떨어지는 묵직하고 따뜻한 콘 포타주 한 캔이 당신의 여행 피로를 마법처럼 녹여줄 것이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