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 서리가 내리는 날의 밥상 – 겨울을 준비하는 늦가을 음식의 지혜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0-23 16:58:39
[Cook&Chef = 이경엽 기자] 오늘(10월 23일)은 태양의 황경이 210도에 도달하는 시기이자, 늦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시기를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 수증기가 엉겨 서리가 내리는 계절”로 정의하며, 농경이 마무리되는 시점으로 설명한다.
상강은 단순한 계절의 구분이 아니라, 한 해 동안 거둔 수확을 정리하고 겨울을 대비하는 ‘식생활의 전환점’이다. 씨를 뿌리고, 비를 견디고, 햇살을 이겨낸 곡식과 채소가 농가의 마당에 내어져 타작과 저장을 기다리는 때, 사람들은 이 절기의 기운에 맞는 음식을 식탁 위에 올리며 계절의 이치를 따라 살아왔다.
한식진흥원 자료에서도 상강은 “가을의 마지막 절기답게 겨울 채비가 한창인 시기”로 정의된다. 이 시점의 식재료는 단순히 먹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추위에 대비하고 기운을 보위하며, 저장성과 영양을 겸비한 생존 음식이자 지혜의 산물이다. 상강의 밥상은 풍요의 끝이 아닌,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체질 전환의 음식’이다.
상강의 자연과 농경 – 음식이 태어나는 배경
과거의 농경사회에서 상강은 단순히 춥다는 기후적 현상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모든 생명이 활동을 멈추고, 땅속으로 기운을 감춘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상강 무렵이면 마무리되는 추수”라고 설명하며,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에 결실을 맺고 그 수확을 마감하는 시기로 본다.
『농가월령가』에는 “들에는 조, 피더미… 벼 타작 마침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상강이 더 이상 경작의 시기가 아닌, 곡식을 ‘저장하고 가공하는 시기’임을 보여준다. 즉, 상강의 음식은 막 수확한 재료로 즉석에서 조리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겨울을 대비해 저장이 가능한 형태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음식이 무김치, 박국, 홍합조림, 고등어 간고등어, 늙은 호박찜과 같은 절기 음식이다.
상강의 대표 음식 ① 늙은 호박 – 몸을 덥히고 기운을 채우는 보양
한식진흥원은 늙은 호박을 “기운을 북돋아 주는 보양 식재료”로 설명하며, 늙은 호박찜은 상강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제시한다. 늙은 호박은 여름 동안 땅의 기운을 흡수하고 가을에 완전히 여문 뒤 수확된다. 겉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은 달고 따뜻한 성질을 지녀, 한방에서는 비위를 보하고, 몸의 부종을 빼주며, 면역력을 높여주는 약재로 분류한다.
늙은 호박찜은 호박 속을 파내고 맥문동, 감초, 육계 등 한방 약재를 우린 물로 찰밥을 지어 호박 속에 넣고, 견과류를 함께 넣어 푹 찌는 음식이다. 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겨울을 버티기 위한 영양의 저장고”였다. 늙은 호박은 수분이 적고 저장성이 높아 상강 이후 마당에 매달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잘라 먹었다. 이는 상강 음식이 단순한 계절 음식이 아니라, 생존을 도모하는 저장 음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상강의 대표 음식 ② 무 – 서리가 맺혀야 단맛이 드는 생명의 뿌리
“무는 찬 이슬을 맞아야 달아진다”는 옛말처럼, 상강 이후의 무는 당도가 올라 가장 맛이 좋다. 한식진흥원은 무를 “찬 날씨에도 노지 재배가 가능해 겨울나기에 도움을 주는 귀한 식재료”라고 설명한다. 상강 시기의 무는 수분이 많고 조직이 단단해 김치, 국, 조림, 나물 등 어떤 조리법에도 어울리는 만능 식재료였다.
무는 감기 예방, 소화 기능 개선, 숙취 해소에 효과가 있어 겨울철 부족해지기 쉬운 체력과 면역을 보완한다. 특히 상강 시기에 담근 김치는 초겨울에 먹기 좋을 만큼 단맛이 풍부하고 아삭한 식감을 자랑한다. 무가 단순한 채소가 아니라 절기 음식의 철학이자, 겨울을 대비하는 민족의 지혜라는 점이 드러난다.
상강의 대표 음식 ③ 녹두 – '100가지 독을 풀어주는' 해독의 음식
녹두는 한식진흥원에 의해 “천연 해독제”로 소개된다. 절기상 상강은 농사일로 지친 몸을 회복하고, 겨울철에 생기기 쉬운 체내 노폐물을 정리하는 시기이다. 녹두는 찬 기운을 가진 곡물이지만, 이 시기에는 기름에 지져내는 빈대떡 형태로 조리해 따뜻한 성질을 부여했다. 녹두빈대떡은 녹두를 곱게 갈아 부재료와 섞고 기름에 부쳐내는데, 이는 몸의 기운을 보하면서도 속을 맑게 해주는 상강의 대표 음식이다.
특히 상강의 계절에는 추어탕, 녹두전처럼 “몸을 덥히는 보양과 해독을 동시에 추구하는 음식”이 발달했다. 녹두는 속을 깨끗이 하고 염증을 낮추는 역할을 하여 겨울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기운의 청소부’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상강의 대표 음식 ④ 고등어와 홍합 – 바다의 기운이 채워지는 시기
한식진흥원은 “고등어는 이 시기의 지방 함량이 가장 높아 1년 중 가장 맛있는 시기”라고 강조한다. 고등어는 비타민 D와 오메가-3가 풍부해 겨울철 우울감과 면역 저하를 예방하는 영양 식품으로 여겨졌다. 상강 무렵 잡은 고등어는 바로 구워 먹거나 염장 처리해 간고등어로 저장했다.
홍합 역시 “찬바람이 불어야 제맛이 난다”고 하며, 피부를 윤기 있게 하고 허약 체질을 보완하는 약재로 쓰였다. 상강의 바닷바람은 홍합의 살을 단단히 여물게 만들어 국, 조림, 탕 등 다양한 음식으로 식탁에 오르게 했다. 이는 상강이 단순히 땅의 곡식만이 아니라, 바다의 생명력까지 식탁에 모이는 절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상강의 식탁이 가진 철학 – 겨울을 이기는 ‘보위(保衛)의 음식’
상강의 음식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기운을 덥힌다. 늙은 호박, 고등어, 홍합은 모두 기운을 보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성질이 있다. 이는 곧 “겨울의 찬 기운을 이기기 위한 준비”이다.
둘째, 저장성과 활용성이 높다. 무김치, 박국, 간고등어처럼 상강 이후의 음식은 대부분 저장해가며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는 곧 절기가 음식의 형태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임을 보여준다.
셋째, 몸의 균형을 맞춘다. 녹두처럼 해독을 돕는 음식과 고등어처럼 기름기를 보충하는 음식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보위(保衛)’ 즉, 몸을 지키는 음식철학을 완성한다.
상강의 음식은 생존의 지혜이자 문화의 기록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말하듯 상강은 단순한 기후의 변화가 아닌 농경의 마침표이자 삶의 방식의 전환점이다. 한식진흥원이 전하는 절기 음식들은 바로 이 전환의 순간에 탄생했다. 상강의 음식은 계절이 바뀌는 것을 음식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의 방식이며,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식의 철학’이다.
상강의 밥상은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선언하는 자리다. 늙은 호박의 따뜻한 단맛, 무의 아삭한 감칠맛, 고등어의 기름진 고소함, 녹두전의 묵직한 풍미 속에는 바로 그 계절을 살아가는 인간의 지혜가 담겨 있다.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