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균의 ‘역사 속 음식이야기’] <3> 매화는 퇴계의 또 다른 자아

염상균 칼럼니스트

cnc02@hnf.or.kr | 2026-08-05 14:59:41

후손이 기른 도산 매실로 매실청을 담가
여름엔 시원, 겨울엔 따뜻하게 군자 흉내

도산서원 매화원  사진 = 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Cook&Chef = 염상균 칼럼니스트] 퇴계 이황(李滉,1501~1570)에게 매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그는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이라 부르며 존칭을 붙였다. 평생 107수의 매화시를 남겼고, 그 가운데 91수를 손수 가려 『매화시첩(梅花詩帖)』으로 엮었다. 한 식물을 두고 이렇게 많은 시를 남긴 데서도 퇴계의 각별한 매화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퇴계는 스스로 매화를 ‘혹애(酷愛)’, 곧 몹시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가 매화를 사랑한 까닭은 옥처럼 맑고 투명한 빛깔, 빙설처럼 깨끗한 자태, 그윽하고 맑은 향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보다 더욱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한겨울 추위를 견디며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퇴계는 이를 고절(苦節), 곧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절개와 지조로 받아들였다. 눈과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는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 군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퇴계에게 매화는 하나의 인격체였다. 그는 매화와 증답시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시를 지으며 오랜 벗처럼 마음을 나누었다. 벼슬을 하던 때는 매화가 귀향을 재촉하는 것으로 여겼고, 귀향한 뒤에는 약속을 지켜 돌아왔다고 매화에게 답했다. 그렇게 매화는 퇴계의 삶 속에서 평생을 함께한 벗이 되었다. 매화의 모습에서 자신이 지향해야 할 삶을 보고, 그 향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화는 퇴계에게 또 하나의 자아였다.

매화의 열매인 매실은 오래전부터 음식과 약재로 널리 쓰였다. 퇴계에게 매화는 먹거리보다 맑은 향기와 고결한 품격을 지닌 벗에 가까웠다.  사진 = 염상균 칼럼니스트

꽃에서 열매로 이어지는 매화의 시간

매화의 열매인 매실은 오래전부터 음식과 약재로 널리 쓰였다. 그러나 퇴계가 사랑한 것은 매실의 실용적 가치가 아니었다. 그는 “음식에 넣으려고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맑은 향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노래했다. 그에게 매화는 먹거리보다 맑은 향기와 고결한 품격을 지닌 벗에 가까웠다. 매화의 향기를 맡고 시를 짓는 일은 곧 자신의 마음을 닦는 공부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매화와 음식의 인연이 멀었던 것은 아니다. 꽃이 진 자리에 맺힌 매실은 시간이 지나며 우리의 밥상으로 돌아온다. 매실청이 되고, 장아찌가 되고, 술과 음료가 되어 오래도록 사람 곁에 머문다. 꽃으로 피어 정신을 일깨우던 매화가 열매를 맺어 맛과 향으로 사람의 삶을 돕는 셈이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일상에서도 각별했다. 늘 매화 화분을 가까이 두고 돌보았으며,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는 곁에 두었던 매화 화분이 자신의 냄새를 맡을까 염려해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인 12월 8일에도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당부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마음은 매화를 향했다.

후대에는 퇴계의 매화 사랑을 단양군수 시절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지는 기생 두향(杜香)과 연결해, 인간적인 정서와 그리움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향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의 야담과 전승이 상당 부분 섞여서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전설이 생겨날 정도로 퇴계의 매화 사랑이 깊고 특별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 뜰에도 피어난 매화, 다시 만나는 퇴계

언제부터인지 퇴계를 흠모하면서 나 역시 매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른 봄이면 매화가 피는 곳을 찾아 고고한 모습과 맑은 향기를 오래도록 보고 느꼈다. 내 땅이 생기면 제일 먼저 심고 싶었던 나무도 매화였다. 도산서원의 매화원(梅花園)처럼은 아니어도 네댓 그루쯤은 심으리라 마음먹었고, 결국 그 뜻을 이루었다.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올해도 과연 매화가 필까 조바심을 내지만, 봄기운이 돌면 매화는 어김없이 꽃봉오리를 맺는다.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면 가슴이 설레어 날마다 나무를 바라보게 된다. 특히 꽃이 피기 직전 별 모양으로 맺힌 봉오리를 보는 느낌도 좋고, 꽃이 피어 향기를 맡으면 더욱 사랑스럽다. 

퇴계는 “음식에 넣으려고 그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우리 집에서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퇴계의 후손이 기른 도산 매실로 해마다 매실청을 담갔다. 지금도 그때 담가 둔 매실청으로 여름이면 시원한 물에, 겨울에는 따뜻한 물에 타 마신다. 황금빛의 새콤달콤한 여운은 퇴계를 다시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맛이 다른 매실청보다 유난히 깊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입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잔의 매실청 속에는 퇴계가 평생 사랑했던 매화의 향기와 도산의 오랜 시간이 함께 우러나기 때문이리라. 꽃으로 정신을 닦게 했던 매화가 열매와 음료가 되어 마음을 위로한다. 담박한 밥상과 매화 향기로 평생을 지낸 선비가 오백 년을 건너 오늘도 내 곁에 다가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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