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탐구] 한가위 제례음식, 조상을 위한 한 끼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 2026-09-22 15:01:32

밥과 국, 술과 적에 담긴 뜻…반가와 중인 가정, 종가의 차례로 살펴본 명절의 음식
조선 숙종 때 소론의 당수이자 성리학자 명재 윤증선생의 종가인 명재고택의 추석 차례상  사진 = KBS

[Cook&Chef = 서진영 기자]차례상에 오른 음식에는 저마다 상징이 있다는 설명이 흔하다. 대추는 자손의 번창, 밤은 조상을 뜻하고 배의 흰 속살은 순수함을 나타낸다는 식이다. 그러나 옛 예서에서 제례음식을 설명하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 음식마다 길상적인 의미를 붙이기보다 조상에게 어떤 음식을 어떻게 올릴 것인지, 집안 형편에 따라 무엇을 줄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었다.

제례음식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상 위의 음식이 조상에게 올리는 한 끼였다는 사실이다. 밥인 반(飯)과 국인 갱(羹)을 한 분마다 따로 차리고, 술을 올리며, 식사를 마칠 때 숭늉을 드렸다. 살아 있는 어른을 모시듯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권하는 것이 제례의 기본이었다.

제물은 상징물이기 전에 음식이었다

기록에 따르는 제례음식은 과일과 나물, 포와 혜, 밥과 국, 떡과 국수, 고기와 생선, 술과 적 등으로 나뉜다. 이 구분은 상의 몇 번째 줄에 놓느냐보다 음식이 의례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가를 보여준다.

밥과 국은 조상을 식사의 주인으로 모시는 음식으로 제례에서 밥그릇과 국그릇을 신위의 수에 맞춰 놓은 것도 조상을 막연한 영혼이 아니라 한 분 한 분의 가족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숭늉을 올리는 절차까지 갖춘 까닭도 평소 식사의 순서를 따랐기 때문이다.

술은 조상에게 예를 고하는 중심 제물이었다. 술잔을 한 번 올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초헌·아헌·종헌으로 나누어 올렸으며, 술을 올릴 때 적을 함께 바쳤다. 적은 고기나 생선, 닭 등을 꼬치에 꿰거나 구워 마련한 음식이다. 『광례람』에는 삼헌에 각각 한 종류의 적을 쓰되 분량은 형편에 맞추도록 했다. 이는 곧, 술과 적은 상을 풍성하게 보이게 하는 음식이 아니라 제사의 진행을 이루는 제물이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예서인 『광례람(廣禮覽)』은 수산(綏山) 권정침(權正針) 등이 저술한 책으로, 전통 제례의 절차와 상차림(제수)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을 담고 있어 조선 시대 식문화와 예법을 연구하는 중요한 원문이다.  사진 = 한국민족대백과사전

포는 생선이나 고기를 말린 것이고, 혜는 식혜나 젓갈을 가리키기도 하다. 나물에는 익힌 나물뿐 아니라 초로 무친 나물과 김치도 포함됐다. 말리고 삭히고 절이는 조리법은 수확한 식재료를 오래 보관하는 생활의 지혜였다. 제례상에는 특별한 날에만 만드는 음식과 함께 집안에서 평소 갈무리해 둔 식품도 올랐다.

과일과 채소는 제철에 구할 수 있는 것을 사용했다. 예서에서 과일을 여섯 가지로 적으면서도 마련하기 어려우면 네 가지나 두 가지로 줄이도록 한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포와 젓갈도 ‘구해지는 대로’ 마련하며 억지로 갖추지 말라고 했다. 제례음식은 반드시 정해진 수량을 채워야 하는 규칙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가운데 정갈한 것을 가려 올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조리서에 실린 조리법도 이러한 제례음식의 바탕을 보여준다.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에 나오는 술 빚기, 고기와 생선 말리기, 장과 초를 이용한 조리, 떡과 면을 만드는 법은 모두 가정의 저장과 조리 기술에 속한다. 이 책들을 차례상의 규칙을 정한 문헌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제례음식을 마련할 수 있었던 부엌의 지식은 확인할 수 있다. 제례상은 예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계절마다 재료를 거두고 갈무리하며 음식을 익혀온 경험이 함께 쌓여야 했다.

반가의 제례는 집안의 규모와 위계를 드러냈다

조선의 제례는 처음부터 모든 계층이 같은 규모로 지낸 의례가 아니었다. 『경국대전』의 봉사 규정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일반 서인은 부모에 한해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차등이 있었다. 이는 조선 전기의 법제적 기준이며, 조선 후기에는 신분을 막론하고 4대 봉사가 널리 행해졌다.. 제례는 효를 표현하는 의례인 동시에 집안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행사이기도 했다.

관직자와 사대부가를 이르는 반가에서는 제례를 집안 운영의 중요한 책무로 여겼다.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과 제사를 위한 토지, 제구와 그릇을 갖추고 여러 세대의 친족이 준비에 참여했다. 농토와 산림에서 나오는 곡식·과일·채소를 비롯해 포와 술, 장과 식초를 미리 마련할 수 있는 살림의 기반도 있었다. 경제력이 큰 집안에서는 제수의 종류가 많아지고 조리 과정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다만 모든 반가의 상이 호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흉년이 들거나 집안 사정이 어려우면 제수를 줄였고, 먼 곳의 귀한 재료를 억지로 구하는 일을 경계했다. 음식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제사 전 몸과 마음을 삼가고, 제물을 깨끗하게 마련하며, 절차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일을 중하게 여겼다. 예서가 과일과 포, 젓갈의 수량을 형편에 맞게 줄이도록 한 것도 지나친 비용 때문에 제사의 본뜻을 잃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다.

제례음식의 준비는 집안 구성원의 공동 작업이었다. 곡식을 찧고 술을 빚으며 포와 과일을 마련하는 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조리를 맡은 여성뿐 아니라 재료를 구하고 제구를 점검한 남성, 음식을 나르고 상을 준비한 친족과 집안사람들이 함께 움직였다. 제례음식은 어느 한 사람의 손맛보다 가문 전체의 노동으로 완성됐다.

중인 가정의 차례는 반가의 축소판이 아니었다

역관·의관·율관·화원 등 전문 기술과 실무를 담당한 중인층도 유교적인 가정의례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관직과 문자 생활을 통해 예서와 의례 절차를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모두가 같은 지위와 경제력을 지닌 계층은 아니었다. 높은 품계에 오른 기술관이 있는가 하면 대대로 실무직을 이어가면서도 넉넉한 재산을 갖추지 못한 가정도 있었다.

따라서 중인 가정의 제례를 반가의 상을 작게 줄인 형태로만 보기는 어렵다. 조선의 법전부터 ‘양반과 중인’이라는 단순한 구분보다 관직의 품계를 기준으로 봉사하는 조상의 대수와 제수 규모를 달리했다. 같은 중인층 안에서도 관직과 재산, 거주 지역, 가문의 연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중인 가정의 구체적인 제수 기록은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같은 중인층 안에서도 관직과 재산, 거주 지역이 달랐으므로 제례의 규모와 음식 구성이 한결같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에 『가례언해』처럼 한글로 풀이한 예서가 나오고 18세기를 지나면서 유교적 가정의례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 조선 후기에는 부모에게만 제사하도록 규정됐던 일반 가정에서도 여러 대의 조상을 모시는 사례가 늘어났다. 신분에 따른 제례의 차등도 점차 흐려졌다. 반가의 예법을 중인과 서민이 일방적으로 모방했다기보다, 각 가정이 공통된 제례의 틀을 자신의 생활 조건에 맞게 받아들였다고 보여진다.

중인 가정의 음식 기록이 반가나 종가의 기록보다 적게 남았다기 보다 문집과 가승, 제례 문서가 대대로 보존된 가문에 비해 일상적인 가정의 차례는 기록으로 남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록의 양이 곧 제례의 중요성이나 음식문화의 수준을 뜻하지는 않는다.

종가의 차례가 보여주는 것

종가의 차례는 한 가문이 예법을 집중적으로 보존한 사례로, 대대로 종손을 중심으로 사당과 제례 문서를 관리했기 때문에 음식의 종류뿐 아니라 준비 과정과 의식의 순서까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진다.

성주의 한주 이진상 종택에서는 추석에 사당에서 차례를 지낸다. 사당은 선대의 신주를 모신 공간으로, 명절이 되면 흩어져 살던 후손들이 모여 조상에게 예를 올리고,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이 어느 가문에 속하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의 차례에는 음식을 올린 뒤 조상이 식사할 시간을 드리는 유식(侑食) 절차가 진행된다. 종손이 술을 올리고 참례자들이 절한 다음 잠시 물러나 기다린 후 상 위의 음식을 실제 식사처럼 대했다는 것을 보면 제수는 상징을 진열한 물건이 아니라 조상에게 권하고 기다려야 하는 음식이었다

종가의 차례 음식의 종류보다 어느 음식을 누가 마련했는지, 어떤 순서로 올렸는지, 제례가 끝난 뒤 누구와 나누었는지가 함께 전승되며 이는 문서와 공간, 제구와 음식으로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됐다.

한가위 제례음식은 일정한 수의 음식을 채우는 규격품이 아니었다. 밥과 국으로 조상의 자리를 마련하고, 술과 적으로 예를 올리며, 계절에 얻은 재료와 집안에 저장해 둔 음식을 형편에 맞게 갖추는 것이 기본이었다. 반가와 중인 가정, 종가의 차례는 규모와 방식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조상을 가족의 한 사람으로 맞아 한 끼를 올린다는 뜻은 같았다. 제례음식을 읽는 핵심은 음식의 수나 진설 공식보다 그 한 끼를 누구와 어떻게 준비하고 나누었는가에 있다.Cook&Chef /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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