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깊게, 통영에 뿌리내리다

서현민 기자

cnc02@hnf.or.kr | 2025-12-02 23:55:25

[정여울 웰피쉬 대표]
서울을 떠난 한 청년의 선택, 정여울 대표가 말하는 로컬 창업과 도시의 리듬
[웰피쉬홈페이지=https://wellfish.co.kr/]

[Cook&Chef = 서현민 기자] 기회는 대부분 서울에 모여 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자극을 받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곳. 그래서 청년들은 가능한 한 오래, 가능한 한 치열하게 서울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여울 웰피쉬 대표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서울에서의 기회를 내려놓고 통영이라는 느린 도시로 향했다. 거기서 사라져가는 지역의 식재료와 기술을 배우고, 기록하고, 연결하는 ‘섬바다 요리학교’를 만들었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도 저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였다. 대표라는 직함보다 먼저 사람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투, 유연한 태도, 수평적인 팀 분위기. 통영의 바람과 빛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본다.

[섬바다음식학교=정여울대표]

Q. 서울에서 통영으로 완전히 정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서울에서의 삶은 계획을 채우고 실행하는 방식에 익숙했어요. 통영은 처음엔 그저 여행지였죠. 그런데 1년, 2년, 7년이 지나면서 이 도시가 주는 울림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어디서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때, 통영이 그 해답을 줬어요. 작지만 깊이 있는 관계,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여지. 감성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통영이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Q. 서울의 기회를 포기하고 얻은 가장 큰 비물질적 수확은요?
A.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얻게 된 거예요. 통영에서는 자연이 일상의 리듬을 결정합니다. 그런 리듬 속에서 ‘왜 이 일을 하는지’를 다시 묻게 되고,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집니다. 단순히 직업적 기준이 아니라 인간관계, 건강, 방향성까지 전반적인 삶의 기준이 명확해졌어요.

Q. 일상의 변화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나요?
A. 서울의 하루는 직선형입니다. 일정이 사람을 움직이죠. 통영은 곡선형이에요. 바다의 빛, 바람의 세기, 어르신들의 속도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흘러갑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어느 순간 그 안에 스며든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Q.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A. 서울식 속도로 다가가려다 실패도 많았어요. 통영에서는 관계가 ‘속도’보다 ‘빈도’로 쌓입니다. 자주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어느 날 한 어르신이 생선국을 건네며 “이제 너도 우리 동네 사람이다”라고 하셨을 때, 비로소 받아들여졌다는 걸 느꼈죠.

Q. 섬바다 요리학교는 어떤 철학으로 운영되고 있나요?
A. 요리를 기술로만 보지 않아요. 그 음식이 어떻게, 왜, 누구에게서 전해졌는지를 함께 배우는 인문학적 교육입니다. 이런 접근은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드는 기반이 됩니다. 요즘 소비자는 ‘왜 만들었는지’를 중요하게 보니까요.

Q. 가장 시급하게 기록해야 할 지역 자산은 무엇인가요?
A. 섬마다 남아 있는 ‘미기록 손기술’입니다. 냄새로 익힘 정도를 판단하고, 손의 힘으로 숙성을 조절하는 기술들은 사라지면 복원할 수 없어요. 저희는 구술 인터뷰, 섬 실습, 손기술 채록 등 다섯 가지 방식으로 이 기술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Q. 장인들과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 장인은 강사가 아니라 창작 파트너입니다. 수업 설계부터 참여하시고, 청년과 수익을 공유하며 브랜드를 함께 만들어 갑니다. 청년은 기술을, 장인은 보람을 얻는 구조입니다.

Q. 수강생이 ‘정착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A. 첫째, 사계절을 온전히 살아봤는가. 둘째, 지역에서 자신의 역할이 생겼는가. 셋째, 서울식 속도가 아닌 지역의 리듬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가. 이 세 가지입니다. 단순한 전입신고로는 정착을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Q. 섬바다 요리학교가 인구소멸 문제에 주는 해답은 무엇인가요?
A. 로컬 창업은 ‘머무를 이유’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통영의 손기술, 식재료, 섬 문화는 복제 불가능한 자산이고, 이걸 기반으로 브랜드를 만들면 청년은 ‘일’을 넘어서 ‘삶의 방식’을 찾게 됩니다.

Q. 앞으로 가장 가능성 높은 식문화 분야는 무엇인가요?
A. 해조류 가공품, 저온숙성 해산물, 발효 기반 섬 식문화가 가장 유망하다고 봐요. 이들을 어떻게 브랜드화하고 스토리와 연결하느냐가 핵심입니다.

Q. ‘웰피쉬’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섬바다 요리학교가 사람과 기술을 만들면, 웰피쉬는 그걸 시장과 연결하는 플랫폼입니다. 뿌리와 줄기의 관계죠. 교육 → 제품 개발 → 글로벌 진출까지 이어지는 구조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청년 창업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A. 통영은 느리지만 깊은 도시입니다. 너무 큰 기대도, 너무 빠른 실망도 하지 말았으면 해요. 이 도시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잘 견디는 이들은 결국 여기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그 여정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섬바다음식학교4기_반건조생선학과 수료식]

정여울 대표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통영의 빛보다 더 깊게 마음에 남은 건 그녀의 태도였다.
자극과 속도가 가득한 서울을 떠나, 느림과 관계를 선택한 사람.
기술이 아닌 철학을, 일보다 삶을 먼저 말하는 사람.

섬바다 요리학교의 문을 나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 이런 도시에서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정여울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나면, 누구든 통영을 다시 가고 싶어질 것이다. 나처럼. Cook&Chef / 서현민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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