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연의 맞춤 양념] (4) 식초②...집 나간 입맛 찾는데 최고

신혜연 칼럼니스트

cnc02@hnf.or.kr | 2026-08-20 15:00:23

방치한 술 항아리 속의 우연한 선물
전통 발효초는 유기산의 보물 창고

전남 보성군의 흑초 전문 기업 ‘초루’ 초입의 초항아리가 늘어선 전경.  사진 = 신혜연 칼럼니스트

[Cook&Chef = 신혜연 칼럼니스트] 요즘 찬장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양념은 단연 식초다. 한여름 집 나간 입맛을 되찾는 데는 식초만 한 게 없다. 매일 만드는 반찬에 식초 몇 방울 더해 산뜻한 산미를 살리고, 아침 빵에는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식초를 듬뿍 곁들인다. 비트와 당근으로 잔뜩 만들어둔 피클은 반찬 겸 간식이 되고, 새콤달콤한 매실청은 온종일 얼음물에 타서 입에 달고 산다.

이렇게 요긴한 식초는 언제부터 우리 부엌에 자리 잡았을까?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조미료가 식초라는 설도 있지만, 우리 전통 식초의 시작은 술이었다. 와인이나 치즈가 그렇듯 한국의 식초 역시 우연한 발효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술을 빚은 뒤 방치해 둔 항아리 속에서 자연스레 시어버린 것이 우리 전통 식초의 기원이다.

가양주와 함께 발전해 온 한국 가양초 문화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계절과 절기에 맞춰 집집마다 술을 빚는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식량 수탈 정책으로 가계 양조가 금지되며 잠시 맥이 끊기기도 했으나, 우리 조상들은 수백 년간 쌀과 누룩, 제철 재료를 어우러지게 해 각 집만의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술을 만들어왔다. 술을 빚다 온도가 맞지 않아 시어버린 술이나 마시다 남은 술을 그대로 두면, 항아리 속에서 저절로 발효가 진행되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오묘한 향의‘새로운 물성’이 탄생했다. 시큼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그 맛을 요리에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조상들은 알코올 발효가 끝난 술을 일부 남겨 공기 중의 초산균이 알코올을 먹고 산酸을 만들어내도록 초산 발효와 숙성을 유도했다. 여기에 새로 빚은 가양주나 술지게미와 물을 지속해서 부어 ‘곡물초穀物醋’ 즉 식초를 만들었다. 항아리 위는 삼베로 덮어 초산균이 숨을 쉬되 이물질은 들어가지 않게 정성껏 관리했다. 이것이 가양초家釀醋로 시작된 한국 식초 문화의 기틀이다. 문헌상으로는 고려 시대<향약구급방>에 식초가 처음 기록되어 있으나, 술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용하게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곡물초로 시작된 가양초는 술, 장과 더불어 한국 발효 문화의 대표적 산물이다. 곡물을 재료로 발효와 숙성을 거친 한국 전통 식초는 누룩의 효소와 곡물의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아미노산과 풍성한 감칠맛을 품는다. 단순한 단면적인 신맛에 그치지 않고, 음식에 스며들었을 때 깊고 구수한 산미를 발휘하는 이유다. 나아가 발효 식초는 체내 순환을 돕고 독소 배출에 효과적이며,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도록 돕는 자연 방부 역할까지 해낸다. 조상들의 지혜가 결집된 결정판이 바로 전통 발효 식초다.

그러나 가양주 금지령으로 맥이 끊겼던 탓에, 현재 국내 식초 시장에서 전통 가양초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다. 2~3개 대형 식품 회사가 생산하는 사과식초, 현미식초 등 주정을 이용한 공장형 양조식초가 시장의 90~95%를 점유하고 있으며, 가양초를 포함한 전통 천연발효식초는 5% 미만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건강용 음료나 명절 선물용으로 제한적으로 소비되는 실정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초루에서 연구 개발한 다양한 흑초 제품들. 천연발효 흑초(5년 숙성), 애플/녹차/망고 발사믹 흑초, 구슬 흑초, 블록 흑초 등. 사진 = 신혜연 칼럼니스트

전통 발효 식초의 맥을 잇는 흑초 명가 ‘초루’

집집마다, 계절마다 제각각의 풍미를 자랑했던 전통 발효 식초 문화가 희미해진 지금, 다행히 애정을 가지고 전통 식초를 연구하며 현대적인 브랜딩을 시도하는 이들을 만나곤 한다. 전남 보성에 자리한 ‘초루’가 대표적이다. 보성 여행길에 들렀던 초루는 입구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진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도열한 수천 개의 옹기 항아리가 선사하는 풍경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초루를 일군 최진섭·한상미 부부는 20여 년 전부터 전통 발효식초, 특히 흑초에 매료되어 전국을 찾아다닌 끝에 보성에 터를 잡았다. 푸르른 오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득량만의 청량한 해풍이 불어오는 188만㎡(57만 평) 규모의 아늑한 분지 지형이다. 바로 옆에는 23만㎡(7만 평)의 해평저수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산과 바다, 호수를 모두 품은 최적의 청정지역이다.

이곳에서는 3백 년 내력을 지닌 무형문화재 이학수 옹기장이 만든 미력옹기 2천여 개를 놓아두고, 벌교산 100% 유기농 현미와 맥반석 천연 암반수를 부어 매일 햇빛과 바람을 조율하며 시간을 들인다. 비니거 파크를 감싼 편백나무 10만 그루의 피톤치드와 봄날의 은은한 벚꽃 향까지 초 항아리 깊숙이 배어든다.

초항아리를 다루는 정성과 연구 개발 노력이 결실을 보아, 현재 초루에서는 3년·5년 숙성 흑초와 현미·흑미·녹차 흑초는 물론, 캐비어 형태로 정제한 발사믹 구슬 흑초, 치즈처럼 강판에 갈아 사용하는 블록 흑초 등 다채로운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4월 무렵 찾아가면 푸른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공간 속, 도열한 항아리 위로 분홍빛 벚꽃 잎이 흩날리는 정취까지 만끽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80년 전통의 초산 명가, 한상준 명인의 ‘초산정’

경북 예천의 ‘초산정’ 역시 전통 식초의 맥을 잇는 명가다. 전국 각지의 장인이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특산물을 소개하는 ‘명인명촌’을 통해 한상준 대표의 발효식초를 처음 접했다. 단 한 숟가락 맛보았을 뿐인데도 시중의 단기 발효식초나 일반 양조식초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구수하고 깊은 산미가 인상적이었다.

1946년 할머니가 담근 보리술에서 출발해 가문의 귀한 양념으로 내려오던 초산을 손자 한상준 대표가 이어받아, 80년 전통의 식초 명가 초산정으로 발전시켰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내력에 전국을 누비며 모은 자료를 더해 전통 식초 복원에 힘을 쏟고 있다.

초산정에서는 현미, 보리, 수수, 기장, 차조 등 다섯 가지 곡식과 쌀누룩을 황토 옹기에 담아 발효시켜 구수한 곡물 식초를 빚는다. 옹기 안에서 100일 이상 초산균이 숨 쉬며 발효를 마치면, 황토 땅속 그늘로 옮겨 오랫동안 숙성시킨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초산과 아미노산, 구연산 등 풍부한 유기산이 산뜻하면서도 입체적인 신맛을 완성한다. 초산정의 발효식초는 뉴욕, 파리, 시드니, 밴쿠버 등지로 수출되며 한국 전통 식초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또한 물 한 방울 넣지 않고 사과 100%를 황토 옹기에서 3년간 발효시킨‘한상준 애사비’와 같은 건강 음료를 선보이는 등 전통 식초의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초루와 초산정 외에도 전통 발효 식초의 뿌리를 찾아 다각도로 가능성을 확장해 나가는 생산자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은 늘 반갑다. 우리 식문화의 올곧은 계승을 위해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 식탁은 한층 깊고 그 그윽한 산미로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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