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티켓 EATIQUETTE] 여러 맛이 모이는 태국의 한 상, ‘삼랍’에 담긴 식사의 질서
정수연 기자
cnc02@hnf.or.kr | 2026-08-03 15:03:36
숟가락이 입에 닿는 식도구, 포크는 밥과 반찬을 모으는 역할
[Cook&Chef = 정수연 기자] 태국에서 여러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으면 각자의 앞에는 흰밥을 담은 접시가 놓인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커리와 국, 볶음, 생선과 채소 요리가 여러 그릇에 나뉘어 오른다. 사람들은 그중 먹고 싶은 음식을 자신의 접시에 조금씩 덜어 밥과 곁들인다. 오른손에 든 숟가락이 입으로 향하는 동안 왼손의 포크는 밥과 반찬을 숟가락 위로 밀어 올린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숟가락과 포크지만 태국 식탁에서는 맡은 역할이 다르다. 식기뿐 아니라 중앙의 공동 요리와 각자의 밥 접시도 분명히 구분된다. 같은 음식을 나누면서도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얼마만큼 먹을지는 저마다 정한다. 함께 차린 한 상이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한 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러 맛을 한 상에 올리는 삼랍
태국의 전통적인 상차림을 이해하려면 ‘삼랍’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랍은 밥을 중심으로 커리와 국, 볶음, 튀김, 채소, 생선이나 고기 요리 등을 함께 차리는 식사 구성을 가리킨다. 한 사람이 하나의 메뉴를 주문해 먹기보다 여러 음식을 한 상에 펼쳐놓고 함께 나누는 방식이다.
삼랍의 특징은 음식의 가짓수보다 서로 다른 맛과 질감이 이루는 조화에서 드러난다. 매운 커리 곁에는 자극이 적은 채소나 달걀 요리를 두고, 부드러운 국물에는 바삭한 튀김이나 생채소를 곁들인다. 짠맛과 단맛, 신맛과 매운맛이 한 요리에 모두 담기기도 하지만, 한 상 위의 여러 음식이 서로의 맛을 보완하기도 한다.
식사하는 사람은 한 메뉴를 처음부터 끝까지 먹지 않는다. 커리를 밥과 곁들인 뒤 채소를 더하고, 다음에는 국물이나 생선 요리로 옮겨간다. 여러 음식 사이를 오가며 한 끼의 맛을 구성하는 흐름이 삼랍 안에 담겨 있다.
함께 먹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폭도 넓어진다. 가족이나 지인과 식사할 때에는 한 사람의 취향만을 따르기보다 매운 음식을 즐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고기와 채소를 원하는 사람을 함께 고려해 메뉴를 고른다. 주문하는 순간부터 각자의 음식보다 모두가 나눌 한 상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태국식 역할을 얻은 숟가락과 포크
여러 요리를 밥과 함께 먹는 삼랍에서는 숟가락이 중심 식기로 쓰인다. 국물이 있는 커리와 잘게 손질한 고기, 채소, 밥알을 함께 담아 먹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포크는 음식을 찍어 입으로 옮기기보다 접시 위의 밥과 반찬을 숟가락 쪽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고기와 채소는 조리 단계에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내므로 식탁용 칼이 필요한 경우도 많지 않다. 숟가락이 음식을 입까지 운반하고, 포크가 한입을 만드는 과정을 돕는 식이다. 태국 식탁에서는 두 식기가 나란히 놓이지만 서양식 식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식기 사용은 19세기 시암 왕실이 서양과의 외교를 확대하던 시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라마 4세 시대부터 서양식 연회와 식기 문화가 왕실과 상류층에 소개됐고, 라마 5세 시대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용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그러나 태국은 서양의 식사법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식기의 형태는 받아들이되, 밥과 국물 요리, 여러 반찬을 함께 먹는 자국의 식생활에 맞춰 역할을 바꿨다. 서양 식탁에서 포크와 칼이 맡던 자리를 태국에서는 숟가락과 포크의 조합이 대신했다. 외래의 도구가 태국 음식에 맞는 새로운 사용법을 얻은 셈이다.
오늘날에도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는 포크로 밥과 반찬을 숟가락에 모은 뒤 숟가락으로 먹는 방식이 기본 예절로 통한다. 일상에서는 메뉴와 개인의 습관에 따라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기도 하지만, 밥과 여러 요리를 함께 차린 식사에서는 숟가락이 여전히 중심에 놓인다.
공동 요리에서 개인 접시까지
삼랍의 여러 요리는 식탁 중앙에 놓이고, 각자는 원하는 음식을 자신의 밥 접시로 덜어온다. 한 번에 많은 양을 가져오기보다 몇 입에 먹을 만큼씩 옮기며 여러 메뉴를 차례로 맛보는 모습이 흔하다. 다른 사람도 함께 먹는 음식인 만큼 필요한 양만 덜고, 다시 먹고 싶을 때 조금 더 가져온다.
개인 접시는 모두의 음식이 한 사람의 식사로 바뀌는 자리다. 매운 커리를 밥 한쪽에 덜고 채소를 곁들인 뒤, 다음에는 생선이나 국물을 선택할 수 있다. 식탁 중앙에 놓인 요리는 같지만 개인 접시에는 서로 다른 양과 순서가 나타난다.
이 방식에서는 함께 먹는 것과 각자의 선택이 충돌하지 않는다. 여러 요리는 모두가 공유하지만 어느 음식을 먼저 먹을지, 어떤 맛을 더 많이 고를지는 개인에게 남는다. 한 상을 나누면서도 각자의 식사 속도와 취향을 유지할 수 있다.
공동 식사의 예절은 음식을 덜어오는 행동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족 모임이나 손님을 맞는 자리에서는 연장자와 손님에게 음식을 먼저 권하고, 필요한 요리가 손에 닿도록 건네는 태도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개인 접시가 자신의 선택을 담는 곳이라면, 공동 요리는 함께 앉은 사람을 살피는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다.
모두의 음식과 개인의 식기를 나누는 촌 끌랑
공동 요리를 나누어 먹는 만큼 음식을 덜어오는 식기도 따로 사용한다. 중앙의 그릇에 놓이는 공용 서빙 숟가락이 ‘촌 끌랑’이다. 촌 끌랑으로 음식을 개인 접시에 옮긴 뒤, 자신의 숟가락과 포크로 식사를 이어간다.
과거에는 개인 숟가락으로 공동 요리를 덜어 먹는 모습도 흔했지만, 위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태국 보건당국은 공동 식사에서 촌 끌랑을 사용하도록 꾸준히 권해왔다. 함께 나누는 전통적인 식사 방식에 공용 식기와 개인 식기를 구분하는 현대의 예절이 더해진 것이다.
촌 끌랑은 중앙의 요리와 개인 접시 사이를 오가지만 입에는 닿지 않는다. 작은 서빙 숟가락 하나가 모두가 나누는 음식과 각자의 식기 사이에 필요한 경계를 만든다. 공동의 식탁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방식이다.
음식과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식사 도구
태국 전역에서 모든 음식을 숟가락과 포크로 먹는 것은 아니다. 북부와 북동부 이산 지역에서는 찹쌀을 손으로 작게 떼어 고기와 채소, 소스에 곁들여 먹어왔다. 찰기가 강한 밥을 손가락으로 뭉치면 반찬과 함께 먹기 좋은 한입이 만들어진다.
면 요리에서는 젓가락과 숟가락이 함께 등장한다. 중국계 국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음식점에서는 젓가락으로 면과 건더기를 집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먹는다. 볶음면이나 한 접시 요리에는 숟가락과 포크가 놓이기도 한다.
태국의 식사 도구는 하나의 규칙으로 고정돼 있지 않다. 밥인지 찹쌀인지, 국물이 있는 면인지 볶음면인지에 따라 알맞은 도구를 선택한다. 지역의 생활 방식과 음식의 형태가 식기 사용을 결정해온 것이다.
여러 맛이 모여 완성되는 태국의 식탁
태국 식탁에서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가운데 놓인 여러 접시다. 매운 커리와 담백한 채소, 국물과 볶음, 부드러운 음식과 바삭한 음식이 한 상에서 서로의 맛을 받쳐준다. 그 앞에 앉은 사람들은 같은 요리를 나누면서도 자신의 밥 접시 안에서 서로 다른 한 끼를 만든다.
숟가락과 포크의 역할, 공동 요리와 개인 접시의 구분, 촌 끌랑의 사용은 모두 이 삼랍의 흐름 안에서 이어진다. 무엇을 함께 나누고 어디에서 각자의 선택을 시작할 것인지가 식탁 위에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다.
여러 맛을 한 상에 모으고, 그 안에서 저마다 먹고 싶은 한입을 고르는 것. 삼랍은 음식을 차리는 형식인 동시에 함께 먹는 사람과 개인의 선택을 한 식탁 안에 담아온 태국의 식사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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