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95km 달리는 일본의 ‘마라톤 미식’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09-22 15:00:43
[Cook&Chef = 이승우 기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은 본격적으로 마라톤이 개최되는 시기이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마라톤 강국, 일본의 사람들은 마라톤 출전에 대비해서 어떤 음식을 먹을까?
마라톤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본인들의 유별난 '달리기 사랑'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매년 열리는 도쿄 마라톤의 참가 신청자는 30만 명을 훌쩍 넘겨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고, 새해 첫날 열리는 대학생들의 마라톤 릴레이 ‘하코네 에키덴’의 TV 시청률은 무려 30%를 웃돈다. 전 국민이 달리기에 진심인 이들은 42.195km를 완주하기 위한 에너지를 채우는 과정조차 철저하고 과학적인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시켰다.
2,500kcal를 태우기 위한 연료, ‘카스테라’와 ‘우동’
성인 남성이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할 때 소모하는 열량은 약 2,500~3,000kcal에 달한다. 성인 하루 권장 칼로리를 단 몇 시간 만에 태워버리는 셈이다. 이 때문에 장거리 러너들은 대회 며칠 전부터 체내에 탄수화물(글리코겐)을 한계치까지 비축하는 ‘카보로딩(Carbo-loading)’이라는 식단 관리를 거친다.
보통 서양이나 한국의 러너들은 카보로딩을 위해 토마토 파스타나 바나나 등을 한가득 섭취한다. 하지만 일본 러너들의 식탁은 사뭇 다르다. 이들은 대회 직전 따뜻한 국물이 있는 ‘우동’이나 찰기가 넘치는 찹쌀 주먹밥(오니기리), 그리고 달콤한 ‘카스테라’를 먹는다.
특히 빵은 소화가 안 된다는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카스텔라는 일본 엘리트 러너들도 애용하는 최고의 카보로딩 식품이다. 서양식 케이크나 페이스트리와 달리, 일본 정통 방식의 카스텔라는 제조 과정에서 버터나 기름(지방)이 단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밀가루와 계란, 설탕과 꿀로만 구워내어 위장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섭취 즉시 폭발적인 에너지(당)로 변환된다.
젖산을 분해하는 우메보시, 100kcal를 압축한 ‘스포츠 양갱’
대회 당일 레이스 도중 에너지를 보충하는 보급식에서도 일본 특유의 색채가 묻어난다. 빠르고 간편하게 당을 충전할 수 있는 화학적인 끈적한 ‘에너지 젤’이 전 세계적인 표준으로 통하지만, 일본의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 급수대에는 붉은 ‘우메보시(매실장아찌)’와 ‘양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단순한 입가심용이 아니다. 달리기 시작한 지 1~2시간이 지나면 근육에는 피로 물질인 젖산이 쌓이는데, 우메보시에 풍부하게 함유된 구연산(Citric acid)은 이 젖산을 빠르게 분해해 피로를 획기적으로 덜어준다. 또한, 달리는 동안 땀으로 배출된 염분을 즉각적으로 보충해 주는 훌륭한 천연 나트륨 덩어리이기도 하다.
팥과 한천으로 만든 전통 과자 ‘양갱(羊羹)’ 역시 러너들의 최애 간식이다. 수분이 많아 달리면서 씹어 넘기기 좋고, 단 40g짜리 작은 스틱 하나로 100kcal 이상의 열량을 낼 수 있을 만큼 에너지 밀도가 높다. 최근에는 아예 한 손으로 짜 먹기 편하게 포장된 러닝 전용 ‘스포츠 양갱’이 출시되어 일본 러너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먹느라 기록 포기”… 미식 러너를 위한 마라톤 추천
일본 마라톤의 진짜 묘미는 달리는 도중 에너지를 보충하는 ‘에이드 스테이션(급수대)’에서 폭발한다. 물과 이온 음료, 초코바 정도만 덩그러니 놓인 여느 대회와 달리, 일본의 마라톤 대회는 그 지역의 명물 먹거리를 내놓는 거대한 야외 뷔페를 방불케 하며 극진한 ‘오모테나시(환대)’를 실현한다. 만약 달리며 미식을 즐기는 ‘펀 런(Fun Run)’을 계획 중이라면 다음의 두 대회를 주목해 보자.
먼저 매년 3월 시코쿠 지역에서 열리는 ‘도쿠시마 마라톤’이다. 수려한 요시노강을 따라 달리는 이 대회는 풍성한 보급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코스 곳곳에서 지역 명물인 한다 소면과 진한 국물의 도쿠시마 라멘, 생선 카츠, 상큼한 영귤(스다치) 주스를 끊임없이 내어주어 참가자들 사이에서 "먹느라 기록 경신을 포기했다"는 유쾌한 후기가 줄을 잇는다.
아예 작정하고 미식을 테마로 내세운 대회도 있다. 프랑스의 메독 마라톤을 모티브로 매년 4월 미야기현에서 열리는 ‘도호쿠 풍토 마라톤’이다. 급수대 대신 '급식소'라 불리는 이곳에서는 갓 구운 최고급 와규 조각, 지역 특산물로 만든 만두와 소바, 심지어 코스를 마친 뒤 즐길 수 있는 수십 종의 사케 테이스팅까지 코스 요리처럼 등장해 러너들의 발걸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달리기는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는 고독한 스포츠라지만, 적어도 일본의 코스 위에서는 지역 사회와 미식이 어우러지는 거대한 축제다. 올가을, 혹은 다가오는 봄 일본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가벼운 러닝화 한 켤레를 챙겨가 보는 것은 어떨까. 땀 흘려 달린 코스 위에서 맛보는 로컬 미식과 완주 후 들이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은 당신의 여행을 한층 더 짜릿하고 맛있게 채워줄 것이다.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