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계량 없는 전통요리라는 오해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3-13 22:38:04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전통요리는 흔히 “손맛으로 한다”는 말로 설명된다. 조금 넣고, 간을 보고, 느낌대로 맞추는 조리 방식이 전통 음식의 특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 조리서를 실제로 살펴보면 이러한 인식은 상당 부분 오해에 가깝다. 15세기 조선에서 기록된 요리책에는 이미 계량 단위가 등장하고, 조리 과정 역시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전기 의관 전순의가 1459년경 집필한 산가요록이다. 산가요록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져 있으며 술, 장, 김치, 죽, 채소 요리 등 약 200여 가지가 넘는 조리법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음식 기록이 아니라 당시 농가 생활과 식문화 전반을 보여주는 생활 기술서이기도 하다.
이 조리서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조리 과정에 계량 단위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시대 요리가 단순한 감각적 조리가 아니라 일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기록되고 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산가요록에 등장하는 계량 단위는 조선의 공식 도량형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당시 부피 단위는 홉, 되, 말, 섬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0홉은 1되가 되고
10되는 1말이 되며
15말이 1섬이 된다.
이러한 단위 체계는 단순히 요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곡물 거래와 세금 징수, 국가 행정에서 사용되던 공식 도량형이었다. 조선 정부는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해 관청에서 제작한 표준 용기를 사용하도록 했고, 여기에 관인을 찍어 기준을 관리했다. 따라서 산가요록에 등장하는 계량 단위는 개인적인 조리 감각이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던 표준 단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기준으로 보면 1되는 약 0.6리터 정도의 부피에 해당한다. 또한 문헌에서는 동이, 병 같은 생활 용기 단위도 함께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1동이는 약 1말 정도의 부피로 사용되었고 1병은 약 6되 정도의 양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용기를 기준으로 조리법을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록은 전통 요리가 ‘대충 만드는 음식’이라는 인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조선의 조리서는 감각에 의존한 기록이라기보다 당시 사회의 도량형 체계 안에서 정량을 기반으로 한 조리 기록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조리서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16세기 안동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진 수운잡방, 17세기 장계향이 집필한 음식디미방, 그리고 19세기의 규합총서나 시의전서에서도 조리 과정에는 다양한 계량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오늘날처럼 그램이나 밀리리터 같은 정밀한 단위는 아니었지만, 일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조리법을 기록하려는 의도는 분명히 존재했다.
이 점에서 전통 조리서는 단순한 음식 기록을 넘어 조리 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일종의 매뉴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장 담그기나 술 빚기, 김치 담그기 같은 발효 음식의 경우 일정한 비율이 중요했기 때문에 계량 단위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외식 산업에서 강조되는 레시피 표준화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레시피 표준화란 같은 요리를 누구나 동일한 맛으로 재현할 수 있도록 재료의 양과 조리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외식업에서는 품질 관리와 교육, 대량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개념은 이미 수백 년 전 조선의 조리서에서도 발견된다. 산가요록의 계량 기록은 요리를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기록 가능한 지식으로 만들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요리책이 인류 역사에서 매우 오래된 출판 장르라는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 출판계에서는 종종 “요리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통계로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요리책의 대중성을 설명하기 위한 관용적 표현에 가깝다. 실제 학술적 출판 통계에서는 이를 공식 순위로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요리책은 세계 출판 시장에서 가장 꾸준히 출간되는 실용서 장르 가운데 하나이며, 현대 서점에서도 가장 많은 신간이 등장하는 분야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음식은 모든 사람이 매일 경험하는 생활 영역이기 때문에 요리책은 시대와 문화가 달라도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장르로 남아 있다.
오늘날 한식을 세계에 소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레시피 표준화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전통 요리를 세계 시장에서 공유하려면 감각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료의 양과 조리 과정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레시피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산가요록은 단순한 고문헌이 아니라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조선의 음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록되고 계량되며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600년 전의 조리서가 보여주는 계량 기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리는 기억으로 전해지는 문화이지만, 동시에 기록으로 완성되는 기술이라고.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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