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포천에서 만난 우리 술, 산사원

신현우 기자

cnc02@hnf.or.kr | 2026-09-30 15:05:06

수백개의 술 항아리 ...입장료 4천원
경기 포천시 화현면에 자리한 전통술박물관 산사원. 우리 술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양조도구, 우곡 배상면의 연구 기록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사진=신현우 기자

[Cook&Chef = 신현우 기자]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늘은 높아지고 들녘의 곡식도 하나둘 고개를 숙인다. 가을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반가운 계절이다. 햅쌀이 나오고 새로운 술을 빚기 좋은 계절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가을을 맞아 경기도 포천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전통술박물관 산사원. 전통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곳이다.

산사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우리 술의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술을 빚을 때 사용했던 크고 작은 옹기부터 시루와 누룩 틀, 술을 거르는 데 사용했던 용수와 소줏고리 등 다양한 양조 도구가 곳곳에 전시돼 있다.

지금이야 온도계로 발효 온도를 확인하고 저울을 이용해 정확한 양을 측정하지만, 과거에는 술을 빚는 사람의 경험과 감각이 지금보다 훨씬 중요했다. 전시된 도구들을 하나씩 보고 있으면 책에서 읽었던 옛 술빚기가 조금씩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책 속에 남아 있는 우리 술

포천 산사원 전통술박물관에 전시된 옛 양조도구. 소줏고리를 비롯해 우리 조상들이 술을 빚을 때 사용했던 다양한 도구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진=신현우 기자

산사원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술과 음식의 흔적이 담긴 옛 책과 자료들이었다. 오래된 책의 빛바랜 표지와 손때 묻은 흔적만으로도 오랜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전시 공간에서는 <이백시>와 <두시정선(杜詩精選)> 같은 옛 시문집부터 <조선요리제법>, <조선음식만드는법>, 우곡 배상면이 펴낸 <우리나라 음식만드는법> 등 근현대 음식 관련 자료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단순히 오래된 책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음식과 술을 기록하고 연구해 온 시간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우리 술은 오랫동안 집집마다 빚어졌다. 오늘날처럼 온도와 시간, 재료의 양을 정확하게 표시한 표준화된 제조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술 빚는 방법은 여러 조리서와 농서, 생활서 등의 기록을 통해 전해졌다.

산사원에 전시된 우리 음식과 술 관련 옛 문헌과 자료들. 오래된 시문집부터 근현대 조리서까지 다양한 기록을 통해 당시의 음식과 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사진=신현우 기자

직접 술을 빚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기록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옛 문헌의 술 제조법은 오늘날의 레시피처럼 친절하지 않다. 재료의 양이나 발효 시간, 온도 등이 생략되기도 하고, 같은 이름의 술도 시대와 문헌에 따라 빚는 방법이 달라진다. 당시의 도량형을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고, 사용한 쌀과 누룩을 짐작하며 실제 술로 옮겨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산사원이 재미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 속 기록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술독과 시루, 소줏고리 등 실제 술을 빚는 데 사용했던 도구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책 속 몇 줄에 머물던 옛 술빚기가 도구와 만나면서 비로소 한 독의 술을 빚는 과정으로 다가온다.

기록을 다시 술로 만들었던 사람

이러한 술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산사원에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이름과 마주하게 된다.

우곡 배상면이다.

1924년 태어난 우곡 배상면은 평생 누룩과 발효, 우리 술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농예화학을 공부하고 미생물과 누룩 연구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후 직접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연구를 이어갔다.

그의 흔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 우곡기념관이다.

우곡기념관 한쪽 벽을 채운 배상면의 연구 기록. 발효와 미생물, 양조에 관한 실험 과정과 수치, 도면 등이 빼곡하게 남아 있다. /사진=신현우 기자

이곳에는 그가 사용했던 연구기구와 자료를 비롯해 오랜 시간 작성한 연구노트와 다이어리 등이 남아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쌓인 기록이다.

<조선주조사>를 비롯한 술 관련 자료들도 흥미롭다. 과거의 술을 찾아 문헌을 살피고, 당시의 양조 기술을 연구하며 다시 실제 술로 만들어보려 했던 과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직접 술을 빚기 전이었다면 오래된 책과 노트 정도로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쌀의 양과 누룩의 비율을 고민하고, 물의 양을 바꿔보고, 발효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술을 경험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문헌에 남겨진 몇 줄의 제조법을 실제 한 독의 술로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한 술병보다 빼곡하게 적힌 그의 기록에 더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우곡 배상면의 연구에서 오늘날 배상면주가까지
우곡 배상면이라는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 전통주 산업의 한 흐름도 만나게 된다.

그가 세운 회사는 이후 장남 배중호가 이끄는 국순당으로 이어졌고, 차남 배영호는 1996년 독립해 아버지의 이름을 딴 배상면주가를 설립했다. 이후 산사춘 등을 선보였고, 오늘날에는 느린마을막걸리를 비롯한 다양한 우리 술을 만들고 있다.

단순히 회사에서 생산하는 술을 홍보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옛 양조도구와 우리 술 관련 문헌, 우곡의 연구 자료 등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과거 사람들이 어떤 도구로 술을 빚었는지, 그 방법이 어떤 기록으로 남았는지, 그리고 그 기록을 현대의 양조인들이 어떻게 이어왔는지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 산사원의 재미다.

실내를 둘러본 뒤 밖으로 나오면 분위기는 다시 달라진다.

포천 산사원 세월랑에 줄지어 놓인 술 항아리.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산사원에서는 술이 익어가는 풍경과 함께 우리 술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볼 수 있다. /사진=신현우 기자

산사원의 대표적인 풍경인 세월랑에는 커다란 옹기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가을 햇볕 아래 늘어선 항아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에서는 계절마저 술을 만드는 재료처럼 느껴진다.

쌀과 누룩, 물을 섞는 것으로 사람의 일은 시작되지만 술을 완성하는 데에는 결국 기다림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을, 술의 시간을 만나는 여행
산사원은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가을날 가볍게 둘러보기 좋은 여행지가 될 수 있고, 우리 술을 좋아한다면 곳곳에서 발걸음이 느려진다. 직접 술을 빚거나 옛 술을 공부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기자 역시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사원을 찾았다. 다양한 시음주와 오래된 양조도구, 고문헌, 그리고 우곡이 남긴 수많은 기록들은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술을 빚었고, 누군가는 그 방법을 책에 남겼다. 시간이 지나 누군가는 그 기록을 다시 찾아 읽었고, 사라져가던 술을 다시 빚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술은 다시 오늘 우리의 상에 오른다.

가을은 곡식을 거두는 계절인 동시에 새로운 술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올가을 포천을 찾는다면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에서 조금 더 들어가 봐도 좋겠다. 산사원의 오래된 책과 도구, 수백 개의 항아리 사이를 걷다 보면 한 잔의 우리 술이 오늘까지 오기 위해 지나온 긴 시간을 만날 수 있다.

| 산사원
・ 주소 : 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동로432번길 25
・ 운영시간 : 오전 8시 30분~오후 5시 30분(입장 마감 오후 5시)
・ 휴무 : 연중 무휴 [구정, 추석연휴 제외]
・ 입장료 : 성인 4,000원, 미성년자 무료
・ 주차 : 자체 주차장 이용 가능

Cook&Chef / 신현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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