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메르카도나'에서 먹거리 장보기
조소현 기자
cnc02@hnf.or.kr | 2026-09-05 15:01:15
하몽부터 갓 짠 오렌지 주스 등...일상으로 파고든 푸드 투어
[Cook&Chef = 조소현 기자] 파리의 에펠탑처럼, 처음 세워졌을 때는 도시의 흉물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시민들의 일상에 녹아들어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된 곳이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인 세비야의 '메트로폴 파라솔(Metropol Parasol)'이다. 지금은 세비야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이자 시민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일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독일 건축가 위르겐 마이어가 설계해 2011년 완공한 세타는 거대한 버섯을 닮은 독특한 모습 때문에 '세타(seta·버섯)'라는 애칭을 얻었다. 거대한 목조 구조물 아래에는 '엔카르나시온 시장(Mercado de la Encarnación)'과 로마시대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유적과 전통시장 위에 현대적인 건축물이 올라선 모습이다.
세타 아래에서 오래된 세비야의 장보기 풍경을 만났다면, '메르카도나(Mercadona)'에서는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적인 장보기를 엿볼 수 있다.
메르카도나는 1977년 발렌시아에서 시작해 스페인 전역으로 매장을 확대한 스페인의 대표적인 슈퍼마켓 체인이다.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1,60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5년 매출은 419억 유로에 달했다. 스페인 내 시장점유율은 29.5%로, 2위인 까르푸의 7.2%를 크게 앞선다. 단순히 ‘유명한 마트’라고 부르기에는 스페인에서 그 규모와 영향력이 상당한 셈이다.
메르카도나의 매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자체 브랜드(PB)다. 식품은 '하센다도(Hacendado)'라는 브랜드로 판매하는데, 통조림, 유제품, 과자, 냉동식품까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식품 대부분을 이 이름으로 만날 수 있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에겐 꿀국화차가 유명하다.
메르카도나에서 쇼핑 하다가 운이 좋으면 커다란 하몽을 통째로 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몽을 전문으로 다루는 직원이 기다란 전용 칼로 고기의 표면을 따라, 붉은 살과 뽀얀 우윳빛의 지방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하몽을 한 장 한 장 얇게 썰어낸다. 우리나라 대형마트의 정육 코너에서 직원이 직접 고기를 썰어 주는 것과 비슷하지만, 메르까도나의 하몽은 현장에서 썬 뒤 정해진 중량으로 포장해 판매한다.
포장된 하몽을 살펴보면 제품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라벨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몽의 품종과 사육·먹이 방식을 구분하는 공식적인 기준이다.
검정색은 100% 이베리코 품종의 돼지를 방목해 도토리와 자연의 먹이를 먹여 키운 최상위 등급이다. 빨간색은 이베리코 혈통이 50~75%인 돼지를 방목해 도토리를 먹여 키운 경우다. 초록색은 들판에서 사료와 자연의 먹이를 함께 먹여 키운 제품을, 흰색은 축사에서 사료를 먹여 키운 제품을 의미한다.
하몽에 붙는 색깔은 소비자가 품질과 가격을 직관적으로 가늠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든 기준이다. 다만 같은 블랙라벨이라도 부위에 따라 맛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직접 고르기 어렵다면 직원에게 원하는 맛이나 지방의 정도를 설명하고 추천을 받는 것도 방법이다.
직원의 추천으로 지방과 살코기가 적절하게 섞인 검정색 라벨의 하몽을 골랐다. 어떤 조미료나 특별한 가공처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숙성된 고기 특유의 깊은 풍미가 느껴졌고, 혀의 체온에 의해 부드럽게 녹은 지방에서는 견과류를 떠올리게 하는 고소한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빵이나 치즈와 곁들이는 흔한 식재료이면서도, 품종과 사육 환경, 먹이, 숙성 방식에 따라 세세하게 구분되고 그 차이를 맛으로 즐긴다는 점에서 하몽은 스페인의 식문화의 디테일을 잘 보여주는 음식이었다.
직접 썬 하몽 말고도 메르카도나를 방문하면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오렌지 착즙 주스이다. 메르카도나의 일부 매장에는 오렌지를 기계에 넣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착즙해 주스로 만들어주는 기계가 설치돼 있다.
특히, 세비야는 그야말로 오렌지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거리와 광장에는 오렌지나무가 가로수로 줄지어 있고, 봄이면 하얀 오렌지꽃인 ‘아사하르(azahar)’의 향기가 도시 곳곳에 퍼진다. 거리의 오렌지 나무는 쓴 맛이 강한 비터 오렌지(Citrus aurantium)나무로, 이슬람 통치 시기부터 정원과 거리의 경관을 꾸미는 데 활용되며 세비야의 풍경에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도 열매는 마멀레이드 등의 재료로 활용되며, 오렌지나무는 세비야를 대표하는 도시 풍경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메르카도나에서 착즙하는 오렌지는 거리의 비터오렌지와는 다르다. 주스로 마시기 좋은 달콤한 식용 오렌지를 사용한다. 1리터 짜리 한병에 4.95유로, 환율에 따라 우리 돈으로 7천원이 넘는 가격이지만 그 자리에서 생으로 짜낸 오렌지 주스의 맛은 가격을 잊고 매일 마시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인공 향료나 감미료 하나 없이 진한 상큼함과 자연스러운 달콤함이 오렌지 주스 본연의 맛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마트 진열대에 어떤 식품이 많은지, 어떤 제품을 자체 브랜드로 판매하는지, 스페인의 식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지의 일상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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