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팔트로 읽는 핀란드의 겨울
정수연 기자
cnc02@hnf.or.kr | 2026-09-18 15:01:16
[Cook&Chef = 정수연 기자] 핀란드의 블러드팔트는 동물의 피에 호밀이나 보리가루, 지방과 양파 등을 섞어 익힌 전통 음식이다. 지역에 따라 완성되는 모습과 먹는 방법도 달라진다. 북포흐얀마에서는 오븐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뒤 얇게 썰어 먹거나 감자와 고기를 끓인 국물에 넣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주먹 크기로 빚어 삶아 한 끼로 먹기도 한다. 같은 계열의 음식이 지역에 따라 구워 잘라 먹는 형태, 삶아 먹는 형태, 국물에 넣어 먹는 형태로 발전해온 것이다.
지역마다 모습은 달라도 중심에는 피와 곡물의 결합이 있다. 이 조합이 핀란드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배경을 따라가면 짧은 여름과 긴 겨울, 호밀과 보리를 중심으로 한 북방 농업, 가을에 집중된 가축 도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핀란드 북부에서는 순록을 이용한 생활과 겨울의 추위를 식재료 보관에 활용한 방식까지 더해진다. 블러드팔트의 형태에는 핀란드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환경에서 무엇을 얻고, 그것을 어떻게 한 끼로 만들어왔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음식이 여러 지역에서 이어져온 흔적은 이름에도 남아 있다. 핀란드에서는 지역에 따라 베리팔뚜(veripalttu·베리팔뚜), 뢰시(rössy·뢰시) 등으로 불려왔으며, ‘팔뚜’는 스웨덴어 팔트(palt·팔트)와 이어진다. 핀란드는 1809년까지 수백 년 동안 스웨덴 왕국의 일부였고, 북부 사람들은 오늘날의 국경을 넘어 생활권을 공유했다. 이런 교류 속에서 음식의 이름과 조리법도 함께 이어졌다.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진 블러드팔트는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생업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췄으며, 핀란드 농촌에서는 호밀과 보리가 중요한 바탕이 됐다.
핀란드에서 호밀과 보리가 중요했던 이유
핀란드는 여름이 짧아 작물의 생육기간도 짧았다. 이런 환경에서 보리와 호밀은 오랫동안 중요한 곡물로 자리했다. 보리는 짧은 생육기간에도 수확할 수 있었고, 호밀도 북쪽의 기후에 잘 적응해 빵과 죽을 비롯한 일상식에 널리 쓰였다. 사람들이 해마다 확보해두던 이 두 곡물이 블러드팔트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농가에서는 곡물과 함께 소와 돼지도 길렀다. 밭에서 거둔 호밀과 보리는 식사의 바탕이 되었고, 소와 돼지는 고기와 지방을, 소는 우유를 제공했다. 농사 기간이 짧고 수확량이 날씨에 크게 좌우되는 핀란드에서는 농사와 가축 사육을 함께 이어가는 방식이 한 해의 식량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름에 거둔 호밀과 보리가 저장될 무렵, 농가에서는 겨울을 앞두고 일부 가축을 도축했다. 이때 저장해둔 곡물과 도축 직후 받은 피를 섞어 굽거나 삶으면서 블러드팔트가 만들어졌다. 핀란드 농촌의 계절에 따라 두 재료가 자연스럽게 한 음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가을 도축과 블러드팔트
핀란드 농촌에서 가을은 수확을 마치는 계절이면서 긴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농가에서는 겨울 동안 먹일 가축의 수와 사료를 고려해 일부 소와 돼지를 이 무렵 도축했고, 고기와 지방, 내장은 겨울 식량으로 손질했다.
도축할 때 받은 피는 빠르게 응고하므로 소금을 넣어 저은 뒤 호밀이나 보리가루와 섞어 굽거나 삶았다. 곡물가루를 섞어 반죽하고 가열하면 혈액의 단백질이 응고하면서 형태가 잡혔고, 신선한 재료를 곧바로 한 끼의 음식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직접 가축을 기르고 도축하던 농가에서는 고기와 지방, 내장, 피를 각각 음식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부위를 어떻게 손질할지에 관한 지식이 가정의 식생활 속에 축적됐고, 블러드팔트도 그 생활지식의 한 부분이었다.
수확과 도축이 마무리되는 시기는 핀란드의 오래된 수확축제 케크리(Kekri·케크리)가 열리는 때와도 겹쳤다. 케크리 식탁에는 새로 거둔 곡물과 도축한 고기, 소시지와 술처럼 그해 농가에서 마련한 음식들이 올랐으며, 베리팔뚜도 케크리 음식으로 전해진다. 가을 수확과 도축이 맞물리는 시기에 반복해서 만들어진 이 전통은 특히 핀란드의 서부와 북부에서 오래 이어졌다.
왜 서부와 북부에서 오래 이어졌을까
핀란드와 스웨덴이 오랫동안 생활권을 공유한 흔적은 음식의 지역 분포에서도 드러난다. 민속학 자료에서는 동물의 피를 재료로 쓴 음식이 핀란드 서부와 북부에 특히 많이 분포한다. 스웨덴 북부에도 같은 계열의 블로드팔트가 전해져, 국경 양쪽의 음식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동부의 정교회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조리법의 분포가 약하게 나타난다. 자연환경 위에 지역의 종교와 생활문화가 더해지면서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재료와 조리법에도 차이가 생긴 것이다. 같은 핀란드 안에서도 블러드팔트가 특정 지역에 더 강하게 남은 배경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서부와 북부의 블러드팔트 전통은 농업과 가을 도축, 스웨덴 북부와 이어진 조리문화가 겹치며 자리 잡았다. 핀란드 최북단으로 올라가면 생활의 기반도 달라지고, 순록 사육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핀란드 북부에서 순록이 중요한 식량이었던 이유
핀란드 최북단 라플란드에는 북유럽 북부의 원주민인 사미가 오래 살아왔다. 사미의 생업은 지역마다 달랐고, 일부 공동체에서는 순록 사육이 생활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했다. 순록은 겨울에도 눈을 파서 지의류를 찾아 먹을 수 있을 만큼 북극권 환경에 적응한 동물이다. 이런 특성은 눈이 오랫동안 쌓여 있는 북부의 목축 생활과 잘 맞았다.
순록 한 마리는 식량과 생활재료를 함께 제공했다. 고기와 지방은 음식으로 쓰였고, 가죽은 옷과 생활용품에, 뿔은 여러 도구를 만드는 데 활용됐다. 순록을 기르고 이용하는 방법은 북쪽의 자연환경에 맞춰 오랜 시간 축적된 생활기술이기도 했다.
도축할 때 받은 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됐다. 그날 먹을 몫은 도축 직후 소금을 넣어 저은 뒤 곡물가루와 섞어 삶았고, 겨울 동안 사용할 몫은 바로 얼려 보관했다. 사미 전통에는 일부 피를 순록의 위에 담아 얼려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잘라 사용하는 방법도 전해진다.
겨울의 낮은 기온은 식재료를 장기간 보관하는 데에도 활용됐다. 서부 농촌에서는 호밀과 보리, 소와 돼지를 중심으로 블러드팔트가 만들어졌고, 핀란드 북부에서는 순록을 식량으로 삼으며 계절의 추위를 저장에도 이용했다. 이처럼 지역의 생업과 자연환경에 맞춰 이어져온 블러드팔트는 20세기에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가정에서 만들던 음식이 공장 제품과 학교급식에도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 가정식에서 공장 제품과 학교급식으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핀란드의 도축과 육가공은 점차 전문 시설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가정에서 계절마다 만들어 먹던 블러드팔트도 공장에서 생산·유통되기 시작했고, 1950년대 핀란드 육가공공장 사진에는 통조림 베리팔뚜가 다른 가공식품과 함께 등장한다.
학교급식은 이 음식이 새로운 세대에게 이어지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됐다. 196070년대 학교생활의 기억 속에도 베리팔뚜가 등장하며, 오울루에서는 2016년에도 뢰시를 감자와 함께 끓인 뢰시포투를 지역 전통을 잇기 위한 메뉴로 연 12회 제공했다. 농가에서 계절에 맞춰 만들던 음식이 식품산업과 학교급식을 거치며 아이들의 일상에도 자리한 것이다.
가축을 직접 기르고 도축하던 생활에서는 여러 부위를 가정에서 손질했다. 식품 생산이 전문화되면서 사람들은 손질된 고기를 상품으로 접하는 일이 많아졌고, 도축 직후의 재료를 직접 다루는 경험도 점차 줄었다. 이 변화와 함께 블러드팔트는 농가의 계절식과 학교급식의 기억을 품은 채, 지역의 전통을 의식적으로 이어가는 음식으로 의미를 넓혀갔다.
오늘날 다시 읽히는 블러드팔트
북포흐얀마를 떠나 다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뢰시를 함께 끓여 먹으며 고향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어린 시절 가족의 식탁과 학교급식에서 먹었던 맛이 오울루와 주변 지역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표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현대 셰프들의 해석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전통적인 베리팔뚜를 버터에 굽고 지역 감자와 돼지고기를 곁들이거나, 뢰시를 새로운 형태의 레스토랑 메뉴로 구성하면서 오래된 향토음식을 현재의 식탁에 맞게 풀어낸다. 생활 속에서 이어져온 음식이 지역의 역사와 개성을 보여주는 미식으로도 역할을 넓혀가는 셈이다.
순록을 활용해온 북부의 전통도 오늘날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현대식 도축 과정에서 순록의 피를 따로 회수해 소시지나 지역 음식에 활용하는 시도가 이어진다. 오랜 생활 속에서는 한 마리에서 얻은 식량을 충분히 활용했고, 오늘날에는 그 방식이 지역 식문화와 자원 활용이라는 가치로도 이어지고 있다.
낯선 음식이 만들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블러드팔트는 검붉은 색과 익숙하지 않은 재료 때문에 다른 식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강한 첫인상을 남긴다. 실제로 2026년 8월 테이스트아틀라스(TasteAtlas)의 ‘세계에서 평가가 낮은 덤플링’ 순위에서는 같은 계열의 블로드팔트가 1위에 올랐다. 테이스트아틀라스는 이러한 순위의 목적을 각 지역 음식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넓히는 데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음식을 이해할 때는 맛과 생김새만큼 그 음식이 만들어진 배경도 중요하다. 세계 곳곳의 식탁에는 곤충과 내장, 뱀, 발효한 생선처럼 다른 지역 사람에게 생소한 재료가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어떤 재료를 음식으로 받아들이는지는 기후와 생태환경, 종교와 생업, 저장기술과 오랜 생활경험 속에서 형성된다. 그 결과 지역마다 익숙한 재료와 조리법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블러드팔트 역시 그런 음식 가운데 하나다. 짧은 여름에 자라는 곡물을 거두고, 가을 도축에서 얻은 재료를 충분히 활용했으며, 북쪽에서는 순록과 겨울의 낮은 기온까지 생활의 자원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낯설게 보였던 음식도 그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핀란드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먹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결과로 읽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블러드팔트를 바라보며 남는 질문도 달라진다. ‘왜 이런 음식을 먹었을까’라는 첫인상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무엇을 식량으로 선택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음식문화로 발전시켜왔는지가 보이는 것이다. 또한 한 나라의 음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음식을 만들어온 사람들의 역사를 함께 읽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 음식의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낯설었던 맛과 모습도, 결국 그곳의 사람들이 자연과 계절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쌓아온 선택의 결과로 이해하게 된다.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