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의 '세상의 모든 사과'] (8) 애플 헌터들의 사과

김경주 칼럼니스트

cnc02@hnf.or.kr | 2026-10-13 15:01:30

선택과 집중으로 사라진 것들을 되찾기
단점이 장점으로 발현되는 귀중한 자원

탕 컨템포러리 서울에서 2026년 8월 29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린 안드레아 갈바니 개인전 《The Lost Garden of Heaven》에 설치된 사과탑. 사진 = 김경주 칼럼니스트 

[Cook&Chef = 김경주 칼럼니스트] ‘애플 헌터(Apple Hunter)’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인터넷 검색창에 넣어보면 사과를 모으며 장애물을 넘는 인터넷 게임이 먼저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애플 헌터는 말 그대로 진짜 ‘사과 사냥꾼’으로, 오래된 사과 품종을 찾아내고, 그 정체를 확인한 뒤 접목해 다시 살려내는 사람들을 말한다.

19세기 미국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과 품종이 존재했다. 1905년 미국 농무부가 펴낸 《Nomenclature of the Apple》에는 1804년부터 1904년 사이 미국 문헌에 등장한 사과는 6,654개 품종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사과는 지금처럼 전국 어디에서나 비슷한 몇 가지 품종을 사 먹는 과일이 아니었다. 지역마다 기후와 토양이 달랐고, 농가마다 서로 다른 사과를 길렀다. 그냥 먹기 좋은 사과가 있는가 하면 파이를 굽기 좋은 사과, 겨울까지 저장해둘 수 있는 사과, 말리거나 술을 빚는 데 적합한 사과도 있었다.

씨앗에서 자란 사과나무는 대개 부모와 똑같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 가운데 맛이나 저장성, 생산성이 뛰어난 나무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그 나무에 이름을 붙이고 가지를 잘라 다른 나무에 접목했다. 그렇게 한 지역에서 태어난 사과가 이웃 농가로, 다시 다른 마을로 퍼져나갔다. 사과 품종 하나에는 자연의 우연과 인간의 선택,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사과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철도와 도로가 발달하고 도시가 커지면서 농산물은 더 먼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슈퍼마켓과 대형 유통망이 성장하자 생산자에게 중요한 것은 맛만이 아니었다. 수확량이 많아야 했고, 크기와 모양이 일정해야 했으며, 운송 과정에서 쉽게 멍들지 않아야 했다. 냉장창고에서 오래 버틸 수 있어야 했고, 소비자에게 익숙한 모양과 이름을 갖는 것도 중요했다.

시장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품종을 각각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보다 몇몇 우수한 품종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과가 과수원에서 밀려났다.

수확량이 적거나 모양이 고르지 않은 사과, 쉽게 상하는 사과, 특정 지역에서만 잘 자라는 사과는 경제성을 잃었다. 농부가 나이를 먹고 농장을 그만두면 그 집에서 수십 년 동안 키워온 품종도 함께 사라졌다. 과수원이 숲으로 변하고 나무가 죽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마저 사라지면 한 품종의 역사도 거기서 끝날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이미 시장에서 밀려난 품종들이 누군가에게는 지금 찾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귀중한 자원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사과를 추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국 남부에서는 크레이턴 리 캘훈(Creighton Lee Calhoun)이 1980년대부터 오래된 사과의 흔적을 좇았다. 농가를 찾아다니고, 과거의 종묘회사 카탈로그와 농업 서적, 편지와 기록을 모았다. 그의 조사 결과는 《Old Southern Apples》로 정리됐고, 개정판에는 미국 남부에서 재배됐던 약1,800개 품종이 기록돼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호른 크리크 농장에는 그의 활동을 바탕으로 지금도 425개 품종의 남부 전통 사과가 보존되고 있다.

메인주의 존 벙커(John Bunker)는 오래된 사과를 찾는 일을 탐정 수사에 비유한다. 누군가 “할아버지가 이런 사과를 길렀다”고 알려오면 그 지역을 찾아가 열매의 크기와 모양, 색과 맛, 익는 시기를 확인하고 옛 기록과 대조한다.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고, 사람의 기억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은퇴한 화학 엔지니어 톰 브라운(Tom Brown)은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애플 헌터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90년대 말 우연히 오래된 사과들을 접한 뒤 애팔래치아 일대를 돌며 사라진 품종을 찾아왔다. 그가 지금까지 찾아낸 희귀하거나 잊힌 사과는 1,200종이 넘는다.

미국 북서부에서는 전직FBI·IRS 수사관 데이비드 벤스코터(David Benscoter)가 과거의 토지 기록과 신문, 종묘회사 목록을 뒤져 오래된 과수원의 위치를 추적했다. 그가 공동 설립한 ‘Lost Apple Project’는 멸종한 것으로 여겨졌던 여러 품종을 다시 확인했다.

애플 헌팅의 방식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사람의 기억과 오래된 기록, 그리고 사과 자체에 크게 의존했다. 이제는 DNA 분석까지 동원된다. 잎에서 유전정보를 추출해 기존 품종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면 비슷하게 생긴 사과를 훨씬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

오늘날 애플 헌팅은 구술사와 문헌연구, 과수학과 유전학이 융합된 일종의 탐정 작업이 됐다.

그렇다면 이미 상품성을 잃어 사라진 사과를 왜 굳이 다시 찾아야 할까.

과거의 시장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거리 운송과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그에 맞는 사과가 필요했다. 소비자도 맛과 품질이 일정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사과를 원했다. 선택과 집중 덕분에 생산성과 유통 효율도 크게 높아졌다.

문제는 시장에서 밀려난 것과 가치가 없는 것을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 생긴다.

한때 단점이었던 특성이 시간이 지나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쉽게 무르고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대형 유통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사과라도, 특별한 향이나 강한 산미를 지녔다면 로컬푸드나 소량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오히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대량생산의 기준에서는 비효율적이었던 특성이 시장이 달라지면 희소성과 차별화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유전적 다양성이다.

미국 농무부의 사과 유전자원 컬렉션에는 현재 55개 종과 재배 잡종을 아우르는 6,079점의 고유 유전자원이 보존돼 있다. 현재 재배되는 많은 사과 품종은 병해충과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 있고, 현대 사과 육종 역시 비교적 제한된 부모 계통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래서 미래의 육종을 위해서는 재배 품종뿐 아니라 오래된 품종과 야생 사과까지 폭넓게 보존할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가 심해질수록 그 의미는 더 커진다. 지금은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옛 품종 가운데 더위나 추위, 가뭄 또는 특정 질병에 강한 특성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 유전자가 미래의 사과를 만드는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옛 품종의 보존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를 선택지를 남겨두는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과는 어떨까.

우리가 지금 먹는 서양 사과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전 한반도에는 능금이 있었다. 고려시대 문헌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고, 조선시대에는 서울 자하문 밖 일대에서 능금이 많이 재배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지금과 같은 서양 사과는 19세기 말 들어왔고, 1901년 원산 부근에 과수원이 조성되면서 재배가 본격화됐다.

이후 국광과 홍옥, 인도 같은 품종이 널리 재배됐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개발된 후지와 쓰가루 등이 빠르게 확산됐고, 1980년대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인 사과 육종이 본격화됐다. 1988년 국내에서 육성된 첫 사과 품종인 ‘홍로’가 탄생했고 이후 아리수, 감홍, 피크닉, 루비에스 등 다양한 품종이 개발됐다.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사라졌거나 거의 사라진 옛 사과 품종을 추적하며 오래된 농가와 버려진 과수원을 찾아다니는 ‘애플 헌터’ 활동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근대적인 사과 재배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고, 농가별로 수많은 독자 품종이 형성됐던 미국과는 품종의 형성과 소멸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도 다르다.

대신 국내에서는 연구기관이 사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1,200여 점의 사과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부는 질병과 자연재해에 대비해 영하 196℃의 액체질소에 초저온 보존하고 있다. 과거의 품종을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며 사과의 유전적 다양성을 넓혀가는 셈이다.

그러나 능금과 같은 재래 과실부터 국광과 홍옥처럼 한때 널리 재배되다 시장에서 밀려난 품종까지, 우리에게도 잊혀가는 사과는 있다. 그 안에 어떤 맛과 유전적 특성,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는지는 다시 살펴볼 만하다.

이 오래된 사과들의 이야기는 최근 미술관으로까지 들어왔다.

최근 서울 탕 컨템포러리에서 열린 이탈리아 작가 안드레아 갈바니(Andrea Galvani)의 《The Lost Garden of Heaven》은 희귀하거나 사라진 사과 품종을 예술의 언어로 되살린 작업이다. 갈바니는 농부와 생태학자, 과수학자, 원예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애플 헌터들과 협업해 과거의 농업 기록과 사과 품종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 사과들을 실물 크기의 세라믹 조각으로 다시 만들어 14개의 식물학적 탑을 세웠다.

애플 헌터들이 생물학적으로 되살린 사과를, 갈바니는 문화적 기억으로 다시 불러낸 것이다.

그 사과들 앞에 서면 사과 하나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 안에는 한 지역의 기후와 토양, 농부의 선택과 식생활, 시장의 변화와 시간이 함께 스며 있다.

시장은 끊임없이 선택한다. 더 많이 팔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효율적인 것과 비효율적인 것을 가려낸다. 그런 선택은 필요하고, 그 덕분에 산업도 발전한다.

그러나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과 가치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오늘의 시장에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특성이 내일의 기후에서는 꼭 필요한 유전자가 될 수 있고, 한때 외면당한 맛이 새로운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도 있다.

애플 헌터들이 오래된 기록과 사람들의 기억을 뒤지고, 버려진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얻어 다시 접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찾아내는 것은 사라진 사과만이 아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외면했던 또 다른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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