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김치의 붉은 색은 전통이 아니었다: 고추, 300년의 역사”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3-21 12:58:07

독초에서 만초장으로: 낯선 식재료의 정착', '발효와 만난 캡사이신: 한국만의 매운맛' [사진=권농종묘 / 고추밭]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한식의 색을 떠올리면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붉은 빛을 떠올린다. 김치의 양념, 고추장의 깊은 색, 찌개와 볶음요리의 매운 풍미까지. 그러나 이 ‘붉은 한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오래된 전통이 아니다. 고추가 한반도 식문화에 자리 잡은 시간은 길게 보아도 약 300년에 불과하다.

고추는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전후해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메리카 원산의 고추는 유럽과 아시아를 거치는 과정에서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고, 이후 중국을 통한 유통과 확산이 더해지며 점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과정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식재료가 정착하는 전형적인 확산 구조로 이해된다.

초기 고추는 지금처럼 일상적인 식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다. 약용이나 제한적인 향신료로 활용되었고, 일부에서는 독성이 있는 식물로 오인되었다는 기록과 구전도 전해진다. 이는 새로운 식재료가 기존 식문화 체계에 편입되기까지 거치는 자연스러운 저항과 경계의 과정이다. 당시 조선의 음식은 장류와 염장, 발효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한 자극을 지닌 새로운 재료가 빠르게 확산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고추가 본격적으로 식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은 17세기 후반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증보산림경제에는 고추를 활용한 장류, 즉 ‘만초장(고추장)’이 등장하며, 고추가 단순한 외래 식재료를 넘어 조선의 식생활 구조 안으로 깊이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김치, 찌개, 무침 등 다양한 조리법에 고추가 사용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붉은 한식’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주목할 점은, 초기의 고추가 지금처럼 강하게 맵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추의 매운맛은 캡사이신 함량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품종과 재배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조선 초기 유입된 고추는 현재보다 자극이 약한 품종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재배 과정에서 점차 매운맛이 강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의 여름철 고온과 강한 일조량은 캡사이신 형성을 촉진하는 환경이며, 여기에 더해 인간의 기호 역시 점차 강한 자극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고추는 품종 선택과 환경, 소비자 취향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사진=픽사베이/관상용 고추]

또한 한국의 매운맛은 단순히 ‘맵다’는 감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나 중남미의 매운맛이 즉각적인 자극과 향신료 중심의 구조를 가진다면, 한국의 매운맛은 발효와 결합되어 보다 복합적인 층위를 형성한다. 고추장은 콩 발효를 기반으로 한 감칠맛 위에 매운맛이 얹히는 구조이며, 김치는 유산균 발효를 통해 산미와 감칠맛이 더해진 상태에서 매운맛이 지속적으로 확장된다. 즉, 한국의 매운맛은 ‘단일 자극’이 아니라 발효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진 ‘지속형 매운맛’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고추는 단순히 외래 식재료가 아니라 한식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재료라고 볼 수 있다. 유입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조리 방식, 발효 기술, 식습관과 결합하면서 완전히 다른 성격의 식문화 요소로 변형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음식에서 고추를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고추는 한식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동시에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고추의 사례는 전통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선택과 환경, 기술이 축적되어 형성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붉은 김치와 매운 찌개는 오래된 유산이기 이전에, 비교적 최근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변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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