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엔에 미슐랭 음식을 즐긴다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 2026-08-10 15:02:50
호텔 룸서비스 대신 유명 맛집 도시락으로 객실 호캉스 즐겨
[Cook&Chef = 이승우 기자] 선택은 의외로 명쾌했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아래서 유명 맛집의 긴 대기 줄을 견딜 것인가, 아니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시원한 백화점 지하에서 최고급 도시락을 고를 것인가.
최근 일본을 찾는 한국 여행객들의 발길이 '데파치카(デパ地下·백화점 지하 식품관)'로 몰리고 있다. 야외 웨이팅의 고단함을 피하고 룸서비스의 금전적 부담을 덜어낸, 이른바 '셀프 인룸 다이닝(Self In-room Dining)'이 새로운 여행의 공식으로 자리 잡으면서다.
'웨이팅 지옥'을 피한 스마트한 피서법
여행객들에게 이번 데파치카 열풍은 단순한 유행이 아닌 '생존형 미식'의 결과다. 과거에는 땀을 흘리며 맛집 앞에 줄을 서는 것이 여행의 훈장처럼 여겨졌지만, 연일 이어지는 살인적인 폭염은 여행객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여름휴가를 맞아 도쿄를 찾은 한 여행객은 "유명 스시집에 가려다 2시간 대기라는 말에 바로 백화점 지하로 발길을 돌렸다"며 "시원한 호텔 방에서 퀄리티 높은 음식을 편하게 먹는 게 진짜 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쾌적한 실내에서 취향껏 음식을 테이크아웃해 객실을 나만의 전용 식당으로 만드는 능동적인 소비가 시작된 것이다.
"2천 엔이면 충분"… 미슐랭 안 부러운 압도적 가성비
여행객들이 호텔이 아닌 백화점 지하로 향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장기화된 엔저(원·엔 환율 하락)가 만들어낸 '압도적인 가성비'에 있다.
데파치카는 일본 전국 각지의 100년 된 노포 브랜드부터 미슐랭 스타 셰프의 요리까지 한자리에 모인 거대한 미식 박람회다. 현지 하이엔드 레스토랑에서 1만~2만 엔을 훌쩍 넘기는 A5 등급 와규 스키야키나 최고급 장어 요리도 데파치카에서는 2,000~3,000엔(약 1만 7,000원~2만 6,000원)대면 훌륭한 도시락 형태로 맛볼 수 있다.
오후 6시 이후 스티커가 붙는 '반값 할인' 시간대를 노리는 여행객들의 치열한 눈치 싸움도 데파치카에서만 볼 수 있는 즐거운 진풍경이다. 화려한 찬합에 담긴 하이엔드 큐레이션은 적은 비용으로도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완벽한 '스몰 럭셔리'를 선사한다.
4천만 방일객 씀씀이, 백화점 매출 지도를 바꾸다
이러한 소비 심리의 변화는 묵직한 숫자로도 증명된다. 일본관광청(JTA) 등에 따르면 방일 외국인 관광객 수는 연 4,000만 명을 돌파했고, 이들의 소비액은 약 8~9조 엔(약 75~85조 원) 규모에 이른다.
막대한 바잉 파워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백화점이다. 이세탄 미츠코시 홀딩스의 실적 발표에 따르면, 도쿄 이세탄백화점 신주쿠 본점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지갑에 힘입어 단일 점포 기준 연 매출 4,000억 엔(약 3조 8,000억 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썼다. 매일 오전 개점과 동시에 한정판 프리미엄 디저트를 선점하려는 다국적 관광객들의 '오픈런'은 이제 신주쿠의 일상이 됐다.
식당을 찾던 여행에서, 공간을 누리는 여행으로
평생 미식을 좇는 외식업계 관계자들에게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변하듯, 여행객들에게 미식의 의미 역시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얼굴을 바꾼다.
단순히 배를 채우거나 SNS에 올릴 사진을 위해 고생을 감수하던 여행객들은 이제 비용과 쾌적함의 완벽한 타협점을 찾아냈다. 단순히 음식을 나열해 파는 것을 넘어, 공간 자체를 반드시 방문해야 할 '미식의 목적지'로 브랜딩한 일본 백화점의 전략이 적중한 셈이다. 폭염과 고물가가 겹친 올여름, 호텔 방을 순식간에 미슐랭 레스토랑으로 바꿔주는 데파치카의 럭셔리 도시락은 가장 합리적이고도 훌륭한 선택지가 되고 있다.
Cook&Chef / 이승우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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