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정상 만찬 – 한 접시의 외교, 경주의 맛으로 세계를 잇다

이은지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0-31 22:03:12

사진 = 대통령실

한식이 외교의 언어가 된 밤

[Cook&Chef = 이은지 기자] 2025년 10월 31일 저녁, 경북 경주 라한셀렉트호텔 그랜드볼룸.

세계 21개국 정상과 경제협력체 대표단이 한자리에 모인 APEC 정상회의 리더스 디너가 열렸다.

이날 식탁 위에 올라간 것은 정치 혹은 경제의 언어가 아니라 ‘한국의 맛’이었다.

한우와 전복, 된장과 인절미, 지리산 국화차와 유자 생막걸리.

한국의 자연과 시간, 노동이 담긴 음식이 세계 정상들에게 가장 세련된 언어로 건네졌다.

이번 만찬의 주제는 “한국의 맛으로 평화를 말한다”였다.

고도 경주의 역사적 정체성과 지역 식재료를 한 접시 위에 담은 구성은,

한국이 지향하는 문화외교의 방향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전채 – 채소의 색, 감칠맛의 언어


식사는 ‘채소 한입 랩 3종’으로 시작됐다.

치자와 백년초로 색을 낸 밀전병에 애호박·당근·표고를 겹겹이 올린 전채는 봄의 빛깔을 머금었고,

무로 감싼 마와 아스파라거스, 오이 속에 계란지단과 표고를 채운 한입 요리는 자연의 균형을 표현했다.


이어 등장한 두 번째 전채는 곶감과 게살을 잣소스로 버무린 샐러드였다.

감태와 깻잎 오일, 고춧가루 오일을 떨어뜨려 한식 재료가 프렌치 플레이팅 감각으로 변주됐다.

짠맛·단맛·고소함이 겹겹이 쌓인 이 요리는,

한국 식재료의 미묘한 균형 감각을 외국 정상들의 입맛에 맞춘 결과물이었다.


메인 – 천년한우와 발효의 품격


메인 디시는 ‘천년한우 갈비찜’이었다.

경주산 한우 등심을 남산 송이버섯, 단호박 퓨레, 간장 소스와 함께 곁들여 깊은 풍미를 냈다.

완도산 전복과 조랭이떡을 더해 바다의 기운을 입히고,

전통 ‘장(醬)’의 단짠 밸런스로 한국 음식의 정수를 보여줬다.


함께 제공된 ‘곤달비 비빔밥’과 ‘순두부국’은 한국인의 식탁을 대표하는 구성이었다.

백김치, 깻잎장아찌, 연근 들깨볶음 등 반찬 3종이 곁들여졌으며,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으로 채식·할랄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음식의 형식은 전통 한식이지만, 그 본질은 국제 무대에서의 ‘환대의 언어’였다.


디저트 – 된장의 짠맛과 단맛의 미학


만찬의 마무리는 된장 캐러멜 인절미와 잣 파이였다.

된장의 짭조름함과 카라멜의 단맛이 서로 어우러져,

발효의 깊이와 디저트의 부드러움이 하나의 조화로 녹아들었다.


이 디저트는 나전칠기 자개 보석함에 담겨 제공됐다.

음식 그 자체가 예술품처럼 완성된 순간이었다.

차로는 지리산 국화차가 내어졌고, 건배주는 유자 생막걸리 ‘호랑이’가 선택됐다.

잔을 들어 올린 순간, 세계 정상들은 한국의 발효 문화가 전하는 ‘시간의 맛’을 함께 나눴다.


셰프 에드워드 리, “음식은 언어다”


이번 만찬의 총괄 기획은 미국계 한국인 셰프 에드워드 리(Edward Lee) 가 맡았다.

그는 한식의 정통성과 글로벌 감각을 결합해, 각 코스마다 상징을 담았다.

곶감과 게살의 조합은 ‘한국의 달콤함과 바다의 깊이’를,

된장 캐러멜은 ‘발효의 지혜와 현대성’을,

한우 갈비찜은 ‘한국의 근성과 품격’을 상징한다.


그는 “음식은 국가의 언어이자 정체성이다. 한식은 그 언어를 가장 정직하게 전한다”고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롯데호텔 조리팀과 농림축산식품부, aT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협업하여

메뉴의 균형, 문화적 상징성,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려했다.


지역에서 세계로 – 로컬푸드 브랜딩의 미래


이번 만찬이 특별했던 이유는 ‘지방의 맛’이 세계 외교 무대 한가운데 올랐다는 점이다.

경주산 한우, 완도 전복, 강원 영월 오골계, 지리산 국화 등 지역 원재료가 그 주역이었다.

이는 농촌 경제 활성화와 로컬푸드 브랜딩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줬다.


지방 소멸이 현실로 다가오는 시대에, 지역의 맛을 국가의 얼굴로 내세운 시도는 상징적이다.

한국 음식이 지방 자원의 가치를 세계 정상 테이블에서 증명해낸 것이다.


한 접시의 외교, 음식으로 잇는 평화


이번 APEC 정상 만찬은 정치적 의제보다 깊은 메시지를 남겼다.

발효와 로컬, 환대와 조화라는 한국 음식의 정신이 ‘한 접시의 외교’로 완성된 밤이었다.


한식은 이제 단순한 전통문화가 아니라,

국가의 이미지와 경제, 관광, 외교를 묶는 복합 문화콘텐츠로 자리잡았다.

경주의 식탁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곧 ‘한식 외교’의 새로운 교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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