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봄과 여름 사이, 초록과 주황의 시간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5-09 11:00:59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초여름의 문턱에 들어서는 5월이면 우리의 밥상 위에도 계절의 색이 짙어진다. 수분을 가득 머금은 초록빛 오이와 흙의 단맛을 품은 주황빛 당근이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익숙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채소지만, 이 두 재료는 서로 다른 시간과 경로를 지나며 한국인의 음식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몸이 필요로 하는 역할 역시 다르게 수행해 온 채소들이다.
오이의 원산지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해졌으며, 정확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삼국시대 이전 혹은 삼국시대 무렵부터 재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오이는 여름철 밥상의 대표적인 채소로 부상한다. 산가요록에는 오이 재배법과 저장법이 기록되어 있고, 음식디미방에서도 오이를 활용한 조리법을 확인할 수 있다. 오이선, 오이김치, 오이장아찌, 냉국과 같은 음식들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계절을 견디기 위한 생활의 지혜이자 여름 밥상의 중심이었다.
오이가 여름철 유독 사랑받는 이유는 전체의 95% 이상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칼륨 함량도 높아 체내 수분 균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운 날씨에는 땀과 함께 수분과 전해질이 빠르게 빠져나가는데, 오이는 이를 보충하는 데 적합한 채소로 여겨졌다. 한의학에서도 오이는 차가운 성질의 식재료로 분류된다. 차게 만든 오이냉국 한 그릇이 갈증을 달래고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이는 오랜 시간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는 가장 현실적인 계절 음식으로 기능해 왔다.
오이가 계절의 열기를 낮추는 ‘차가운 위로’였다면, 당근은 몸속 에너지를 채워주는 채소로 우리 일상의 끼니 속에 스며들기까지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당근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 산맥 일대 일대로 알려져 있으며, 초기 품종은 지금처럼 주황색이 아닌 보라색과 흰색에 가까웠다. 이후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전해졌고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익숙한 주황색 당근은 17세기 네델란드에서 개량된 품종으로, 한국에는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학교 급식과 김밥, 잡채 문화가 확산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일상 요리의 중요한 색과 맛을 담당하게 됐다.
산림경제와 임원경제지에서도 당근의 재배와 활용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다
만 조선시대에는 무가 훨씬 중요한 뿌리채소였기 때문에 당근은 약재적 의미나 부재료의 성격이 강했다. 지금처럼 김밥 속 당근이나 잡채의 색감을 책임지는 모습은 사실 근현대 식문화가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당근이 현대인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이유는 풍부한 베타카로틴 때문이다. 베타카로틴은 체내에서 비타민 A로 전환되어 눈 건강뿐 아니라 피부와 점막 보호, 면역 기능 유지에도 도움을 준다. 특히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 세포 손상을 줄이고 노화를 늦추는 데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근은 기름과 함께 조리할 때 흡수율이 높아지는 특징이 있다. 볶거나 구웠을 때 단맛이 깊어지고 영양 흡수도 좋아지는 이유다. 최근에는 당근 라페, 로스팅 당근, 퓌레 등으로 활용 범위가 넓어지며 한식과 양식을 넘나드는 재료로 재조명되고 있다.
오이와 당근이 함께 자주 사용되는 채소이면서도 영양학적으로는 주의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오이에는 아스코르비나아제라는 효소가 들어 있는데, 이는 비타민 C를 산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오이와 당근을 생으로 함께 무쳐 먹을 경우 당근 속 비타민 C가 일부 손실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효소는 산성 환경에서 활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식초를 곁들이거나 드레싱을 더하면 영향을 줄일 수 있다. 또한 당근을 살짝 익혀 사용하면 베타카로틴 흡수율이 높아져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조합이 된다. 한국의 무침 문화와 절임 문화 속에는 식재료 간 조화를 만들어내는 이런 생활의 지혜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오이는 몸의 열기를 낮추고 수분을 채워주며, 당근은 몸을 보호하고 에너지를 보충한다. 하나는 계절의 갈증을 달래고, 다른 하나는 일상 속 부족한 영양을 메운다. 성질은 다르지만 결국 우리의 몸을 돌본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가공식품과 자극적인 음식이 일상이 된 시대에도 계절에 맞춰 자란 채소를 먹는 일은 여전히 가장 자연스러운 건강 관리 방법이다. 오랜 시간 한국인의 밥상 곁을 지켜온 오이와 당근 역시 계절의 흐름 속에서 몸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재료였다. 초록빛 수분과 주황빛 단맛이 어우러진 지금의 한 끼는, 어쩌면 계절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단순하고도 분명한 신호인지 모른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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