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복, 철가방을 들던 소년이 사부가 되기까지

정서윤 기자

cnc02@hnf.or.kr | 2026-05-11 20:35:10

후각을 잃고도 중식의 길을 놓지 않은 사람 출처 : 이연복셰프 개인SNS

[Cook&Chef = 정서윤 기자] 이연복 셰프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중식 대가, 목란의 주방장, <냉장고를 부탁해>의 스타 셰프, 방송 14년 차 방송인. 그러나 그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모두 걷어내면, 그의 시작점에는 열세 살 소년이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무거운 배달가방을 들었던 아이, 생계를 위해 중국집 문턱을 넘었던 소년이다.

그 출발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한 화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넉넉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중식당이 어려워지며 학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졌고, 결국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그때부터 그가 든 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배달가방이었다. 지금처럼 가벼운 배달통도 아니었다. 당시 중국집 배달가방은 나무로 만들어져 무거웠고, 음식이 쏟아지면 욕을 듣고 음식값까지 물어야 했다. 이연복의 요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꿈을 향한 선택이라기보다, 살아가기 위해 들어선 길이었다.

그는 이후 여러 중식당을 거쳐 열일곱 살에 명동 사보이 호텔 중식당 ‘호화대반점’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중식 1세대의 전설로 불리는 장홍기 셰프 밑에서 배웠고, 도제식 주방의 엄격한 질서 안에서 칼을 잡았다. 중식 주방은 역할이 분명한 세계였다. 불을 다루는 자리, 면과 만두를 맡는 자리, 재료를 썰고 다듬는 자리마다 위계가 있었고, 어린 요리사는 그 안에서 몸으로 기술을 익혔다. 이연복은 그 시절을 지나며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의 젊은 날은 기술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주방 안의 파벌, 관계의 배신, 화교라는 위치에서 겪은 차별, 생계의 압박이 함께 있었다. 그는 한때 성격이 세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외상값을 받으러 다니는 험한 일도 맡았고, 사람에게 기대했다가 상처를 받기도 했다. 지금 대중이 기억하는 부드러운 미소와 푸근한 말투는 처음부터 주어진 인상이 아니다. 험한 시간을 건너며 조금씩 다듬어진 얼굴이다.

출처 : 이연복셰프 개인SNS


생계를 배운 주방, 인생을 배운 시간

스물두 살 무렵 찾아온 주한 대만 대사관 조리장 자리는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최종 후보들과 겨룬 실기 면접에서 그를 합격시킨 요리는 동파육이었다. 그는 이 음식을 지금도 운명의 요리처럼 기억한다. 대사관 조리장이 된 뒤에는 안정적인 수입이 생겼고, 가정도 꾸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연회와 손님을 상대하며 요리의 폭을 넓혔다.

대사관의 주방은 일반 식당과 달랐다. 같은 손님에게 같은 요리를 반복해서 내는 곳이 아니었다. 외교 행사가 열릴 때마다 손님은 바뀌었고, 메뉴도 달라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중식의 기술뿐 아니라 상황에 맞춰 음식을 구성하는 감각을 배웠다. 열세 살 배달소년으로 시작한 길은 어느새 귀빈의 식탁을 책임지는 자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평탄한 상승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요리사로서 가장 치명적인 사건은 스물여섯 살 무렵 찾아왔다. 대만에서 축농증 수술을 받은 뒤, 그는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됐다. 요리사에게 후각은 생명과도 같은 감각이다. 특히 중식에서 불맛은 혀보다 코에 먼저 닿는다. 냄새를 잃었다는 사실은 요리사로서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연복은 그 사실을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주방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손님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요리를 떠날 수도 없었다. 배운 것이 요리였고, 살아온 자리도 주방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감각을 다시 훈련했다. 미각을 더 예민하게 유지하기 위해 담배를 멀리했고, 과음도 피했다. 점심 피크타임에 배가 부르면 간을 보는 감각이 무뎌질 수 있어 아침을 거르는 생활도 이어갔다. 수증기를 손으로 느끼며 조리 정도를 확인했고, 맛의 균형을 더 세밀하게 잡으려 했다.

후각 상실은 그에게 비극이었지만, 이연복은 그것을 자기 일을 포기할 이유로 두지 않았다. 대신 남아 있는 감각을 더 엄격하게 관리했다. 이 지점에서 이연복의 인생은 분명해진다. 그는 요리를 통해 인생을 한 번에 바꾼 사람이 아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요리 안에서 자기 자리를 다시 만들어온 사람이다.


일본에서 배운 웃음과 장사의 감각

이후 그는 일본으로 향했다. 친구의 권유로 건너간 오사카에서 처음부터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고, 낯선 환경에서 다시 일을 배워야 했다. 이미 대사관 조리장 경력이 있었지만, 그는 일본에서 경력을 앞세우지 않고 설거지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 과정은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 생활이 그에게 남긴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서비스와 장사,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배우게 한 시간이었다. 그는 일본 특유의 접객 문화를 경험하며 웃으며 손님을 맞는 습관을 익혔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했던 인사가 나중에는 진심이 됐다고 했다. 일본에서의 10년은 이연복의 날카로웠던 인상을 유순하게 바꾼 시기이기도 했다.

또 그는 그곳에서 손님의 입맛을 읽는 법을 배웠다. 일본 손님, 중국 손님, 한국 손님이 원하는 맛은 조금씩 달랐다. 같은 중식이라도 어떤 손님 앞에 놓이느냐에 따라 조정이 필요했다. 한국식, 일본식, 대만식 요소가 섞인 만두처럼, 그의 음식에는 여러 문화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화교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대만 대사관에서 일하고, 일본에서 장사를 배운 이력은 이연복의 중식을 더 넓게 만들었다.

1998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중식당 ‘목란’을 열었다. 이름은 중국 설화 속 인물 화목란에서 가져왔다. 어린 나이에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에 나간 목란의 이야기가, 어린 나이에 배달가방을 들어야 했던 자신의 처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목란이라는 이름에는 효와 책임,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다.

그러나 목란의 길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월세 인상, 건물 문제, 재개발 등 자영업자가 겪는 현실이 그의 식당에도 찾아왔다. 몇 차례 자리를 옮겨야 했고, 주방을 지키는 일만큼 공간을 지키는 일도 중요해졌다. 그럼에도 이연복은 목란을 자신의 이름만 걸린 식당으로 두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주방을 지켰고, 방송 촬영은 휴무일에 맞췄으며, 인터뷰는 영업이 끝난 뒤 늦은 시간에 진행했다. 유명 셰프의 식당에서 정작 셰프를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목란은 달랐다. 그곳에서 이연복은 얼굴마담이 아니라 주방장이었다.


중식을 방송으로 옮긴 사부

이연복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방송을 통해서였다. <냉장고를 부탁해>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에서 그는 빠른 손놀림과 편안한 말투, 안정적인 요리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그가 방송에 나선 이유를 단지 인기 때문으로만 보면 부족하다. 그에게 방송은 중식의 이미지를 바꾸는 통로였다.

오랫동안 중식은 배달 음식, 기름진 음식, 조미료가 많은 음식이라는 편견 안에 갇혀 있었다. 이연복은 방송에서 가정에서도 만들 수 있는 중식, 좋은 재료로 충분히 깔끔하게 즐길 수 있는 중식, 보기보다 먹었을 때 진짜 맛있는 중식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중식이 꼭 강한 화력과 전문 주방에서만 가능한 음식은 아니라는 것도 알리고자 했다.

그는 레시피 공개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탕수육 반죽, 깐풍기 소스, 가정용 중화요리 팁을 방송에서 여러 차례 소개했다. 비법을 공개한다고 해서 누구나 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집에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봤다. 중식을 혼자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중식을 즐기게 만드는 쪽을 택한 셈이다.

이 태도는 후배 셰프를 향한 마음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강의실을 채운 학생들의 눈빛을 보면 오래 수업해도 힘든 줄 모른다고 했다. 동시에 걱정도 했다. 요리사를 꿈꾸는 젊은이는 많아졌지만, 그중 끝까지 남아 즐겁게 요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 <알토란> 합류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여러 실력자와 신예 셰프를 소개하고 싶어 한다. 실력 있는 셰프들이 시청자에게 자기 요리를 보여줄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방송인 이연복은 셰프 이연복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러나 그 얼굴이 향하는 곳은 결국 다시 주방과 후배들이다.

출처 : 이연복셰프 개인SNS


재료를 속이지 않는다는 기준

이연복의 요리 철학은 화려한 말보다 단단한 원칙에 가깝다. 그는 음식의 맛을 재료 70%, 기술 30%로 본다. 좋은 재료를 쓰면 음식은 맛있어질 수밖에 없고, 요리사는 재료를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중식 대가라는 이름에 비해 그의 원칙은 복잡하지 않다. 재료를 속이지 않는 것, 초심을 잃지 않는 것, 억지로 멋을 부리기보다 먹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내는 것. 그 기준을 오래 지켜온 사람이다.

그는 일부러 대단한 연구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지나가다 먹은 음식이 맛있으면 어떻게 이런 맛이 났는지 생각하고, 일상에서 마주친 식재료와 음식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요리는 그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이어지는 생활이다. 그래서 그의 중식은 기교보다 성실함에 더 기대어 있다.

그가 샥스핀 메뉴를 가게에서 없앤 일도 같은 기준 안에서 읽힌다. 상어가 잔인하게 포획되는 영상을 본 뒤, 자신의 가게에서 샥스핀을 쓰지 않기로 했다. 대가의 요리는 맛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재료를 쓰고, 어떤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도 포함된다.

그의 방송 출연과 홈쇼핑, 광고 활동 역시 이름만 빌려주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제품은 직접 맛보고 평가하며, 완성도가 마음에 들 때까지 시식과 조정을 거친다고 했다. 대중은 ‘이연복’이라는 이름을 믿고 음식을 선택한다. 그는 그 신뢰가 자신의 손을 떠난 뒤에도 가볍게 소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요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

최근 이연복은 매장에서 거의 은퇴했다고 밝혔다. 아들에게 목란을 넘겼고, 레시피와 식재료 관리는 하지만 요리에서는 어느 정도 손을 뗐다고 했다. 오랜 세월 불과 기름, 연기 앞에서 일한 몸에는 후유증도 남았다. 알레르기 증상 때문에 방송에서 요리할 때 약을 먹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요리를 그만둔 이연복”으로만 읽기는 어렵다. 그는 열세 살에 배달가방을 들고 시작해, 호텔 중식당과 대사관, 일본의 주방과 목란, 그리고 방송까지 지나왔다. 직접 웍을 잡는 시간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그가 중식을 전하는 방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제 그는 음식을 만드는 자리에서, 중식의 경험과 기준을 나누는 자리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이연복은 요리를 통해 한 번에 인생을 바꾼 사람이 아니다. 생계 때문에 시작한 요리 안에서 버텼고, 후각을 잃은 뒤에도 남은 감각을 붙잡았고, 일본에서 장사와 접객을 배웠고, 목란에서 자기 이름을 지켰고, 방송에서 중식의 문을 넓혔다. 고비마다 그는 요리 밖으로 달아나기보다, 요리 안에서 다시 설 자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연복을 사부라고 부르는 일에는 단순한 존칭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기술을 가진 요리사이고, 식당을 지켜온 오너이며, 방송을 통해 중식을 알린 대중적 인물이다. 동시에 후배들에게 일이 얼마나 고되고 오래 걸리는지, 그래도 한 길을 놓지 않으면 어떤 이름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철가방을 들던 소년은 긴 시간을 지나 사부가 됐다. 그 여정은 화려한 성공담이라기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계속 다시 일어선 사람의 기록이다. 이연복의 중식이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요리는 한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고비마다 주방으로 돌아와 자기 자리를 다시 만든 시간의 맛이다.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