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홍로 한 잔, 어의죽 한 그릇에 담긴 고향의 시간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 2026-07-08 16:55:51

‘평화를 이야기하는 20인의 식탁’ 네 번째 마당, 실향의 기억과 평양의 여름 음식을 나누다 [사진=사단법인 내일의 식탁/ 평화를 이야기하는 20인의 식탁]

[Cook&Chef = 서진영 기자]  음식과 식문화를 매개로 남북의 경계를 낮추고, 한반도 평화와 공존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사단법인 통일농수산사업단이 주최·주관하고 통일부가 후원한 ‘평화를 이야기하는 20인의 식탁: Peace Table Season 1’ 네 번째 마당이 서울 종로구 권농동 ‘내일의식탁’에서 열렸다. 이번 회차의 주제는 ‘고향의 맛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평양에서 전해진 전통주 감홍로와 평양 어죽, 곧 어의죽을 통해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기억과 한반도 식문화의 뿌리를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행사는 김원일 이사장의 프로그램 소개로 문을 열었다. 김 이사장은 ‘평화를 이야기하는 20인의 식탁’이 음식을 맛보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그릇 안에 남아 있는 삶의 방식과 이주의 기억, 정체성의 이야기를 함께 듣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은 인천 대청도의 만둣국, 조선시대부터 전해진 콩송편 등 한반도 북녘의 음식 기억을 따라가며 개인의 삶과 이주, 고향의 감각을 나누어 왔다. 네 번째 식탁은 감홍로와 어의죽을 중심으로 실향민 가족의 기억을 불러냈다.

이날 이야기를 이끈 이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43호 이기숙 명인이었다. 이 명인은 평양에 뿌리를 둔 감홍로(甘紅露)의 역사와 제조 과정을 소개하며, 실향민 부모 세대가 간직해 온 술의 기억을 들려줬다.

[사진=신현우 기자 / 명인이 들려주는 대를 이은 감홍로 ]

감홍로는 육당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전주 이강고, 정읍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은 술이다. 감홍로의 명성은 고전 속에서도 확인된다. 『춘향가』에서는 이몽룡과 춘향이 이별하는 장면에 감홍로가 등장한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정을 나누는 술로 감홍로가 놓인다. 『별주부전』에서도 감홍로는 귀한 술로 나온다. 자라가 토끼의 간을 얻기 위해 용궁의 좋은 음식과 술을 내세우는 대목에서 감홍로는  손님을 대접하고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내놓는 최고급 술로 그려진다. 

감홍로의 감(甘)은 단맛을, 홍(紅)은 붉은빛을, 로(露)는 증류할 때 소주고리에 맺히는 술방울이 이슬과 같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이기숙 명인은 이날 “로(露)는 임금께 진상하던 술에 붙일 수 있던 글자”라고 설명했다. 이름 그대로 감홍로는 달고 붉으며, 이슬처럼 맑게 맺힌 귀한 술이었다.

이어, 전통주의 제조 방식과 거르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방법을 설명 했다. 탁주는 곡류와 누룩, 물을 발효시킨 뒤 거칠게 걸러낸 술이고, 약주는 술덧을 맑게 걸러낸 술이다. 소주는 발효주를 증류해 얻은 술이다. 감홍로는 이 증류주의 계보 위에 약재의 향과 붉은빛, 단맛을 더한 술이다.

제조 과정은 깊고도 세심하다. 소주를 두 번 증류한 환소주에 용안육, 계피, 진피, 정향, 생강, 감초, 지초 등 일곱 가지 약재를 넣어 침출한 뒤 숙성한다. 도수는 40도에 이르지만 약재의 향과 은근한 단맛, 붉은빛이 어우러져 목 넘김이 부드럽다. 참가자들은 감홍로 한 잔에서 높은 도수의 자극보다 오래 빚은 향과 묵직한 여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을 계승하기까지의 노고와 사랑이 담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통을 잇는 일의 어려움도 함께 전해졌다. 이 명인은 감홍로에 들어가는 주요 재료의 수급이 갈수록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구온난화와 기후 변화로 약재의 작황이 흔들리고, 예전처럼 안정적으로 좋은 원료를 확보하기 어려워졌다는 설명이었다. 감홍로 한 병에는 오래된 제조법뿐 아니라, 변해 가는 환경 속에서도 술의 원형을 지켜내려는 명인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감홍로 옆에는 평양 어죽(어의죽)이 올랐다. 이기숙 명인은 아버지가 평양의 유두날 끓여주던 기억을 꺼내며

[사진=신현우 기자 / 감홍로 이민형 대표가 직접 끓인 어죽(어의죽)과 감홍로 ]

그 유래와 만드는 법을 들려줬다. 평양에서는 여름철 대동강 뱃놀이를 다녀온 뒤 남자들이 직접 끓여 함께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더운 날 물가에서 돌아와 불을 피우고, 재료를 다듬고, 한 솥의 음식을 끓이는 일은 함께 먹을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배려와 나눔이 담긴 평양의 여름 음식이었다.

이날 소개된 어죽은 정성이 깊은 한 그릇이었다. 닭을 푹 고아 살코기만 발라 찢고, 우둔살은 곱게 다져 넣는다. 여기에 달걀을 더해 단백질을 보태고, 다진 마늘과 다진 파, 붉은 고추와 풋고추를 잘게 다져 향과 색을 더한다. 생선의 감칠맛, 닭고기의 깊은 맛, 고기의 고소함, 채소의 산뜻한 향이 한데 어우러져 여름철 지친 몸을 다독이는 음식이 된다.

화려한 잔칫상이 아니라 마음을 보태 끓이는 음식이었다. 한 그릇 안에는 더운 날을 무사히 건너기 바라는 마음, 함께 먹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 이웃과 음식을 나누며 안부를 묻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감홍로 한 잔과 어죽 한 그릇이 함께 놓이자, 식탁은 술과 음식의 조합을 넘어 실향의 기억을 듣고 나누는 자리로 깊어졌다.

이날의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의 마음을 알 수 있던 식탁이었다. 감홍로는 평양에서 전해진 술의 기억을 품었고, 어죽은 가족과 이웃이 함께 먹던 여름의 한 그릇을 불러냈다. 두 음식은 낯선 북녘의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가 만들고 누군가의 고향에서 나누던 생활의 맛으로 다가왔다.

‘평화를 이야기하는 20인의 식탁’ 네 번째 마당은 음식으로 평화를 말하는 방식이 거창한 선언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줬다. 술을 빚는 손, 아버지가 끓여주던 죽의 기억, 이웃과 나누던 한 그릇의 온기 안에도 평화의 언어가 있었다. 감홍로와 평양 어죽은 이날의 식탁에서 고향을 잃은 이들의 기억을 불러내고, 서로의 삶을 묻고 듣게 하는 매개가 됐다.

[사진=댜한민국식품명인 제43호 이기숙 명인의 감홍로]

음식은 오래 간직한 기억을 꺼내는 가장 부드러운 방법이다. 감홍로와 평양 어죽은 북녘의 음식이라는 낯선 경계보다 먼저, 한반도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함께 나누어 온 온기의 기록이었다. 분단이 그어놓은 선은 차가울지라도, 대동강 물가에서 끓여내던 어죽의 구수한 냄새와 소주고리에서 이슬처럼 맺히던 술방울의 달콤함은 여전히 우리의 핏줄 속에 같은 맛으로 흐르고 있다.

결국 평화란 거창한 구호나 세련된 선언에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의 고향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 시절 그들이 나누었던 마음의 한 자락을 식탁 위에서 함께 맛보는 것. 어쩌면 남과 북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가장 강력한 시작은, 이렇듯 서로의 삶을 묻고 다독이는 따뜻한 밥상 한 그릇에서부터 이미 싹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식탁 위에서, 그리운 고향의 시간은 그렇게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Cook&Chef /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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